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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BL] 너와 가는 세상에 1권 ㅣ [BL] 너와 가는 세상에 1
벨수국 지음 / 시크노블 / 2018년 2월
평점 :
처음에는 재일이가 왜 저렇게 예민한가 했어요. 아무리 아파도 그렇지 하면서 조금 과하다 생각하기도 했고 원래부터 과도하게 난폭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정이 갈 수 가 없었는데.
그러나 1권을 찬찬히 읽다보니 화가 데 키리코가 남긴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이 세상 어떤 종교보다 화창한 날 길을 걷는 사람의 그림자 속에 더 많은 미스터리 가 있다" 라던 말. 지재일의 아주 일부분밖에 엿보지 못한 채 어찌 그렇게 섯부르게 판단을 내리나.
한번 마음을 열고 나니까 재일이가 지르는 비명이 들려왔어요. 물론 작가님께서 의도적으로 재일이의 속내를 보여주신 덕분이겠지만요. 안광현이랑 싸운 뒤에, 전학보내려는 어머니에게 재일이가 했던 말이 귓가에서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부터 날 멀쩡하게 안 보는데." SNS 등지에서 활동하시는 장애인들의 말씀을 듣다 보면 제일 힘들때가 동정어린 시선을 받을 때라고 하시더라고요. 자신은 그저 이렇게 태어났고, 이게 기본이자 당연한 나 자신인데 자꾸만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재단하고 바라본다고. 시혜적인 태도를 유지한 채 필요하지 않은 동정을 강요받는 게 제일 끔찍하다고 여러번 강조하셨어요. 그저 약한 몸으로 태어난 재일이도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재일이가 강단있고 꿋꿋한 사람이라 너무 좋았어요. 안광현에게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하러 갈때 서러워하거나, 억울해하지도 않고. 그저 '필요에 의해 하는 것이다' 는 마음가짐을 하고서 솔이와 함께하기 위해 사과한다는 말을 듣고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런 사람좋음은 끝의 끝까지 가서도 변하지 않아요. 기현 선배가 생령 또한 이기적이고, 윤리에 매여있지 않은 존재다. 하면서 솔이를 설득시켰지만. 그리고 재일이가 제 욕심에 따라 솔이를 함께 저승으로 데려가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물론 자꾸만 윤솔과 함께 죽으려는 재일이를 보면서 이기적이라는 감상도 들었었는데 생각해보면 그래도 재일이 또한 나름 절박하지 않았었나 싶어요. 재일이는 자신의 허약한 몸을 싫어했으니까. 자신이 건강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을 포기하지 못했겠죠. 물론 이해는 했으나 공감한 건 아닙니다. 그저 마약과 같은 중독이었다고 생각해요.
정말로. 중독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의존하는 중독자들처럼요. 누가 봐도, 어떠한 시선으로 봐도 죽음보다는 삶이 나은데 자꾸 죽으려 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까지 죽이려 하는 그 감정을 중독이라는 단어가 아니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일이는 끝까지 솔이를 이기지 못했어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일은 할 수 없었고, 자신과 함께 죽어줬으면 했으면서도 정작 솔이가 죽어버리는 모습은 보지 못했어요. 모순적이지만 그러한 면모가 재일이의 상냥한 면모라고 생각해요.
아, 이 이야기를 빼먹을 수도 없지요. 솔이를 보려고 몰래 한국에 들어왔다가 안광현에게 폭행당해 혼수상태로 있었던 3년을 알리기 싫어 증명할 방법을 찾느라 연락을 못했다고 힌 거짓말을요. 물론 맞는 말이기야 해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이 없어 연락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배신감에 치를 떠는 솔이를 보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그런 솔이의 곁을 떠돌았던 마음은 대체 어땠을까요. 그럼에도 솔이를 걱정해 진실을 말하지 않고. 안광현과의 마지막 대화에서도 끝까지 자신이 저질렀다고 감싸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헌신적일 수 있나 싶은 마음뿐이네요.
솔이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 작품 초반부터 재일이에 대해 신경쓰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렇게 생각했고, 앞으로 영영 보지 못하리라고 예감했을 때에도 자신의 마음보다는 재일이에게 꼭 필요할 것이라 생각이 드는 말을 꺼냈어요. 위에서 언급한 내용 기억하시나요? 동정받고 싶지 않은 재일이에 대해서요. 2권에서 재일이의 시점이 진행될 때. 재일이는 감정이 절절하게 녹아든 솔이의 시선을 받으며 측은함일까, 동정일까 하며 치를 떨었었죠. 그러다가 솔이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나서 얼마나 기분좋아했는지도 기억나요. 솔이는 그런 사람이에요. 함부로 남을 자신에 맞추어 재단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하던가요. 솔이는 자신에게 처음 찾아온 사랑이라는 감정에, 그리고 그 감정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겨운 현실에 도리어 사랑과 재일이에게 매달리게 됩니다. 자신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그 모습에 무척이나 걱정스러웠어요. 아무도, 심지어 부모님마저도 자신의 편이 되어주질 않는다는 건 무척이나 슬픈 일이니까요. 서로에게 나쁜 영향만 끼친다고 걱정하는 어른들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스스로의 마음이 있고, 선택이라는 걸 할 수 있는 솔이에게서 기어이 선택지를 빼앗아야 했을까요. 남들이 보기에는 훌륭한 엔딩이더라도 그 속의 주인공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렇게 헤매었던 이유가 단지 재일이네 어머니의 시기심 때문이라는 것을 안 이후로는 그저 둘이서 함께하는 것만이 해피엔딩이라는 생각을 확고히 다졌지만요. 아,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사실을 알기 전에도 사랑하고 있는 둘이 어떻게 떨어질 수 있나 계속 생각했어요.
와 그런데 후반즈음 해서 되게 소름돋았어요. 다들 아시겠지만 1인칭 시점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서술자가 진실마저 아니라고 부인하고 믿지 않아버리면 서술자의 서술에 의존하는 독자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거. 1권에서는 분명히 안광현이 넘어갈 때 발과 관련된 설명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는데, 2권에서는 타인이 솔이가 먼저 발을 걸었다고 폭로해버리고. 완전히 깜빡 속아넘어갔어요.
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위의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착하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었구나. 그저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이었어.
하지만 어느 누구도 완전히 착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완전히 나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솔이의 충동적인 부분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겁이 많은 성격 또한 부인할 수 없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재일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죽음까지 불사하고, 재일이가 자신을 선택하며 포기한 것을 직시한 채 "네가 나를 선택해주었으니 나도 어디까지나 너와 함께할게." 하며 유서까지 준비해놓습니다. 재일이가 솔이를 떠올려 살아난 것도, 솔이가 재일이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한 것도 전부 진심일 거예요.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고 슬프다고 생각합니다. 둘은 완전히 반대 방향의 것을 염원하지만, 상대를 위해 원하는 것에서부터 올곧게 반대 방향으로 걸었고, 그리하여 중간에서 함께하게 되었어요. 어느 누구라도 미련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방향을 틀었다면 불가능했을 이야기지요. 그래서 더더욱 드라마틱하네요.
마지막으로. 1권의 중반즈음부터 분위기는 미묘하게 스산해졌고 저는 그게 좋아요. 소설 자체가 어쩌면 재일이를 닮은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