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평전 -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 서강인문정신 16
이주동 지음 / 소나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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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고속도로에서 17번 국도로 접어들어 여수 가는 길에 가을바람과 바닷바람이 만난다. 이만큼 쾌적한 느낌의 바람을 쐬기 위해선 9월 말에서 10월 중순 사이의 어느 휴일에 과감히 바다로 떠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내와 함께 돌산공원 중턱의 벤치에 앉아, 노랫말이 된 '여수 밤바다'를 내려다보고 향일암 인근의 숙소로 돌아온다.

 

양평의 용문산 은행나무를 보러 간 가을에는 우리 둘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내의 배 속에 출생을 넉 달 앞두고 있는 아기 '겸손이'가 같이 있다. 문득 "우리 겸손이가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냐"고 묻는 아내에게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을 두서없이 말하다가, 일단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 "무엇보다 따뜻한 사람이면 좋겠지요."

 

'따뜻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떠올린 사람은 프란츠 카프카였다. 지난여름 서강대 이주동 명예교수의 노작 『카프카 평전 -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를 읽고 계절이 바뀌었건만, 세세히 묘사된 카프카의 40년 남짓한 삶이 아직 내겐 끝나지 않았다. 흑백 사진을 여럿 남긴 카프카는 대부분 힘 있는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어 그의 사진을 보는 이마저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숙한 지성과 고도의 감성을 겸비한 소년 카프카에게는 그의 앞날을 옭아맬 굴레가 두 가지 있었다. 프라하에서 자수성가한 유대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아들 프란츠를 강하게 키우고 싶었다. 당시 프라하에 있던 5개의 김나지움 중 한 곳에 프란츠를 보내고,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게 했다. 그의 본성과 맞지 않는 선택이었지만 그는 견디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강압적인 훈육은 그의 마음속 깊이 응어리로 남는다.

 

한편 카프카는 유대인이면서 프라하에서 태어났고, 독일어로 글을 썼다. 그는 성인이 되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유대 시온주의의 전면에 나서진 않았지만 운동의 흐름을 늘 주시했고, 20세기 초 이상주의적 유대인 정착지로 주목 받은 팔레스타인에서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고 싶다는 꿈도 가졌다.

 

강압적인 아버지의 존재와 자신의 민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작가로서의 프란츠 카프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지만, 현실의 카프카를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프라하 노동자재해보험공사의 성실하고 유능한 직원으로서 14년간 근무했다는 사실이다. 공사(公社) 직원으로서 그가 받은 급여와 퇴직 후 수령한 연금은 삶의 기반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조정되었지만, 카프카가 다닌 노동자재해보험공사의 근무 시간은 오후 2시까지였다. 그는 퇴근을 하면 잠을 자 두고 일어나 밤이 깊도록 글을 썼다. 말하자면 카프카는 직장과 직업을 분리한 사람이었다. 카프카 생전에는 작가로서 이름을 알린 것보다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을 거듭한 것이 오히려 더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직장 생활에도 매우 충실했다. 그러한 가운데 입사 후 4년이 지난 1912년에 완성한 작품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변신」이다.

 

법학 전공 지식을 바탕으로 설득력 있는 보고서를 작성했던 카프카는 직속상관과 소속 부서의 국장이 "그가 없으면 온 부서가 마비될 것"이라고 할 정도로 일을 잘했는데, 또한 그의 동료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고 있고 적대자가 한 사람도 없다"며 카프카의 인간미를 칭찬했다고 한다. 알로아 귀트링이라는 이 직원은 카프카를 "우리 직원의 귀염둥이"라고 표현한다.

 

카프카의 사무실 청소를 맡았던 한 아주머니의 회고는 그의 인간미를 가장 잘 드러낸다. "예를 들면 오전에 먹다 남겨 둔 포도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보통 그것을 먹다 버린 것처럼 남겨 두지요. 그러나 카프카 박사님은 그걸 맛없는 퇴적물처럼 보이게 두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포도나 과일을 예쁘게 작은 접시에 놓아 두시지요. 그리고 제가 사무실에 들어가면, 다른 말을 하다가 슬그머니 내가 혹시 그것을 필요로 하는가를 물으십니다. 그래요, 카프카 박사님은 저를 늙은 청소부로 취급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카프카의 임종을 함께한 여인 도라 디아만트는 그가 죽음을 1년도 채 남겨 놓지 않았을 무렵 잠시 베를린에서 지낼 때 있었던 일을 들려준다. 카프카는 슈테클리츠의 공원으로 그녀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가 인형을 잃어버려 울고 있는 여자 아이를 만났다. 소녀를 달래기 위해 카프카는 여행을 떠난 그 인형이 조금 전 자기에게 편지를 보내 자초지종을 알려 왔다고 이야기를 꾸몄다.

 

그 편지를 보고 싶다는 소녀의 간절한 부탁에 카프카는 집에 놔두고 온 편지를 내일 가져다주겠다고 했고, 집으로 돌아와 마치 작품을 집필하듯 ‘인형의 첫 편지’를 작성하여 다음날 다시 공원에서 만난 소녀에게 읽어 주었다. 그 후 3주일 이상 카프카를 통해 그 인형의 편지는 계속 배달되었고, 카프카의 창작에 의해 여행을 떠난 후 학교에 다니고 결국 결혼을 하게 된 인형은 소녀가 자신과의 이별을 성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수영을 좋아했지만, 한편으론 병약하여 자주 요양을 가야 했던 카프카도 이맘때의 여수에 와 본다면 좋아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사무실 청소부 아주머니에게 조심스레 건넸다는 그 말, 그리고 슈테클리츠 공원에서 아직 글자도 읽을 줄 모르는 여자 아이에게 정성껏 지어내어 들려주었다는 그 이야기를 독일어로 말하는 카프카의 음성 그대로 들어 보고 싶다. 올가을 닮고 싶은 카프카의 음성이다.

 

- 광주과학기술원(GIST) 도서관 웹진 117호(2012.10.01.)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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