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진자 1 - 개정판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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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만 위험한 독단과 신념, 인간 지식의 오류에 대한 이야기>

잘 들으셔. 간단한 설명이 최선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드릴 테니까…


움베르토 에코가 하고자 한 말은 카소봉의 연인인 리아의 이 말이 아닐까?

한정판 성격으로 나온 책의 표지는 그 동안 미뤄왔던 에코 소설에 대한 동경에 마침표를 찍게 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표지 디자인 하나 바꾸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독자를 만들어내는 출판사의 아이디어가 기발한 것 같다.  사실 오랫동안 에코의 책들을 잊고 있었는데 이번 리커버에디션 덕분에 저 깊은 기억의 자락 어딘가에 놓여 있던 한토막  ‘에코 책 읽기’라는 계획이 다시 전면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한정판인 듯하여 냉큼 주워 담았는데, 아뿔싸! [장미의 이름]은 이미 품절이었다. 그래서 가끔씩은 인터넷 서점을 뒤적여야 하는구나. 당장에 읽을 듯이 마음이 동해 구입해 놓고선 정작 읽지도 않아 책들이 쌓여만 가는데에 대해 죄스러워 도서 구입을 자제하느라 온라인 서점을 근 한달 찾아가지 않은 것이 이런 불상사를 낳게 한 것이었다.

냉큼 구입한 만큼 이번에는 쌓아놓지 않으리라는 마음 가짐으로 책장을 넘겨 읽기 시작했다.

한달 정도 걸렸다. 3권 분량이 한권으로 통합되어 출판되어 1150페이지에 이르렀다. 낮은 베개 높이다. 바쁜 일이 있으면 며칠 못읽기도 해서 그런지 중간 중간 흐름이 끊겨서 힘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용의 방대함과 주인공의 회상과 현실이 교차되고, 시간의 선후가 교차되어 며칠 만에 책을 다시 잡을 때는 소설의 시간과 회상인지 현실인지 헥갈릴 때가 있었다. 시간은 직선적으로 흘러간다는 사람들의 통념을 깨려는 에코의 시도였는지 모를 일이다.

[푸코의 진자]의 이야기 구조가 직선적이지 않고 여러 매듭으로 나누어지고 흩어지고, 다시 어느 지점에선거 하나의 줄기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보니 중간에 길을 읽기가 십상이다. 나 역시 한번 제대로 읽고 있는건지 의심이 들어 인터넷의 서평도 몇 읽어보기도 하였다. 나 혼자 어려워하는 건 아니구나라고 위안을 삼고, 끝까지 잘 마무리해서 읽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서평들은 책의 주인공을 카소봉, 벨보, 디오탈레비를 중심 인물로 소개한다. 나는 이들보다는 카소봉의 두번째 연인인 리아야 말로 움베르토 에코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이며 책의 결론을 전달해주는 인물이라고 본다. 나머지 인물들은 나약하고, 오만하고, 독단적이고, 위험한 인간상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책을 마치고 2주 정도 지나고 나서 드는 생각이다. 

이 독후감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니 사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책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제대로 읽었는가 등등. 결국 자판에서 손을 떼고 산책을 하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조금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내가 읽은 [푸코의 진자]는 인간의 인식에 대한 통렬한 비판서라 할 수 있다. 보통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그 말도 맞지만 ‘보고 싶은데로 본다’가 더 맞는 말인 듯 하다. 억지, 오해, 잘못된 믿음, 착각…하지만 그것이 무엇이건 ‘잘못된 신념’이 되는 순간 그 독단적인 생각과 행동은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극단적 학살까지 자행하기에 이른다. 

이 책의 주요 주제는 중세 십자군원정의 과정에서 형성된 성전기사단이 프랑스 왕의 탄압에 의해 강제적으로 해체되었지만 사실은 비밀리에 조직이 유지되며, 기독교 사회의 질서에 해가 된다고 자신들이 믿는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존속해왔다는 것이고 최근의 가장 큰 사태가 제2차 세계대전의 유대인 학살이 그것이라는 음모론이다. 등장 인물들은 지금도 성전기사단의 비밀은 유지되고 있다고 믿고, 이 비밀의 열쇠를 풀기 위해 중세시대부터 역사를 조사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면서 그 음모에 한발씩 다가서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등장 인물들이 음모를 만들어가고 있고, 이야기를 짜맞추고, 그러다 보니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에 자신들이 빠져들고 믿게 되어버린다. 모든 것이 특정의 목표를 위해 조직된 것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리아가 말했다. 

잘 들으셔. 간단한 설명이 최선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드릴 테니까…”

리아는 주인공 카소봉이 그럴듯하게 엮은 연구 결과를 단순하고 현실적인 생각으로 반박해버린다. 그들이 만든 것이 허상이기에 그들의 전제 조건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면 모든 게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 오류로 가득한 인간 군상들 >

에코는 주인공에 해당하는 카소봉을 ‘관찰’과 ‘역사적 자료’를 중시하는 과학적 탐구정신의 대표로 설정한 것 같다. 카소봉이 성전기사단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서 자료를 찾아다니고 분석하는 모습을 통해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한 전형적인 인간상을 보여주지만, 그 역시 자기 논리에 자기가 빠지면서 허덕거린다.

벨보라는 인물은 음모론에 대해 관심있는 출판 기획자인데, 카소봉과 같이 음모론 관련 서적을 기획하고 자료를 조사하다가 그 자신이 음모론에 깊숙이 빠지게 되고, 오히려 그가 그 음모의 비밀의 열쇠를 갖고 있는 유일한 인물로 오해받으며 음모론 추종자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디오탈레비는 카소봉, 벨로와 더불어 음모론을 파헤치는 인물인데 소설 후반부에 암으로 죽는다. 왜 죽였을까? 혹시 자신의 앞날에 대해 한치 앞도 예상하지 못하는 오만한 인간에 대한 경고로 등장하는 인물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스파이더맨의 주연을 맡은 톰 홀랜드 주연의 [필그리미지]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아일랜드의 수도사들이 종교적 이유로 성물을 이탈리아 교황청까지 ‘모시고’ 가야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 성물이란 다음 아니라 이교도들에 의해 카톨릭 성자 한분이 돌에 맞아 죽었는데, 그 성자를 죽게한 돌덩이가 성물이었다. 여하튼 이 돌덩이 성물을 로마로 옮기는 과정에서 로마에서 온 수도사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 하기 위해 자신의 행동은 늘 하느님의 말씀으로 정당화하고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의 뜻을 거역했다며 같이 간 수행자들을 버린다. 



< 에코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처럼 인간의 신념이라는 것은 늘 자의적이다. 칼 포퍼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어떤 신념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거짓된 신념, 그럴듯하게 보이는 지식, 편견으로 가득 찬 영혼을 정화하거나 맑게 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술이다...산파술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확신에 대해서도 의심할 수 있도록 가르침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한다 (칼 포퍼, 추측과 논박)

에코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이것일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 되어 간다. 

늦었다. 파리를 떠나면서 단서를 너무 많이 남긴 것 같다….오늘 내가 한 생각을 모조리 여기 적어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그랬다 해도 <그들>은 내 글을 읽고, 여기서 또 하나의 괴상한 이론을 유추해내고, 내 글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밀지를 해독한답시고 세월을 보낼 테지….쓰든 안 쓰든 다를 것이 없다. 침묵하고 있어도 침묵의 배후에서 의미를 찾으려 할 테니까…그러나 저들에게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 믿음이 없는 저들에게.

마지막 줄의 ‘저들’은 누구일까? 아마도 그냥 우리들 독선으로 가득차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우리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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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창작과비평, 2010.

이미지에 대체텍스트 속성이 없습니다; 파일명은 IMG_0868-1024x575.jpg 입니다.


  실크로드에 관심이 많아 책이 출판되었을 때부터 사두었지만, 처음 몇 쪽을 읽고 선 책장에 꽂아두고선 잊었다. 그동안 꽂아두기만 한 게 죄송스러울 따름인 책이다.


올해(2019)에는 내가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지성대장정”이라고 거창한 ‘프로젝트’이름을 짓고, 그간 사두었던 책들을 읽어보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놓고 안 읽은 책, 또는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책들을 읽어보자는 심산이다. 


하지만 이런 계획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읽을 책을 고르려는 순간 그때 그때의 내 감정, 기분에 따라 ‘선택받는 책’이 달라지고, 이러다 보면 분명히 끝내 읽지 않는 책이 생기리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해서, 나의 기분에 관계없이 무작위로, 또는 약간의 의무감으로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도서 리스트를 작성하기로 했다. 


우선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보면서 책들의 제목을 주욱 넘버스 (맥컴퓨터의 엑셀 프로그램)에 기록했다. 130권이 나왔다. 그 다음은 어떤 순서로 읽느냐이다. 역시 내가 읽고 싶은 순서대로 책을 배치해놓으니 마음이 확 닿지 않는 책들은 자꾸 순번에서 뒤로 밀렸다. 안되겠다. 무작위이어야만 했다. 넘버스에 입력한 책 목록의 글자색을 흰색으로 바꿔 책의 제목을 가려버렸다. 그리곤 마구 뒤썩어 편집해버렸다. 게임카드를 무작위로 섞어버리듯이. 이렇게 해서 나도 모르는 책 순번 리스트가 정해졌다. 이제 책을 고를 때마다 순번이 앞선 책만 글자가 보이게 글자색을 변경했다.


‘이번에는 무슨 책일까?’라는 호기심이 발동한다. 기대감도 생기니 책 한권을 독파할 때마다 흥미가 생긴다.

그래서  첫 번째로 선택된 책이 정수일 선생님의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이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문장들>



첫 페이지를 열고 마지막 페이지를 닫을 때까지 우리 글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존경심이 절로 났기 때문이다. 여느 글들과 달리 편안하게 글줄을 따라갈 수 있었고, 읽는 나도 격조가 높아지는 느낌 마저 들었다. 문장의 진의를 흐리는 불필요한 꾸밈없이 단아하고 품위가 있는, 그러나 권위적이지 않은 글들에서 지은이 정수일 선생님의 깊은 연륜과 넓은 통찰이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처음으로 감동받은 글은 다들 좋아하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다. 그 후에는 거의 읽어보지도 못한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 그리고 최근에 읽은 바로 이 책이다. 물론 훌륭한 문장을 쓰는 분들은 많을 것이나 내가 읽은 독서량이 빈한하여 다른 뛰어난 글들을 아직 접하지 못했을 뿐이리라. 아마 읽고 또 읽다보면 이렇게 빼어난 글들을 많이 접하게 될 것이다. 



책을 읽는 중에 무엇이 이렇게 좋은 문장을 만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풍부한 어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문장을 쓰면서 사용하는 단어가 몇이나 될까?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나 같은면 이런 단어를 썼을 것 같은데 도대체 이 단어는 어떻게 생각이 날까’라고 묻게 된다. 이런 의문은 사실 선생님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 살아온 인생의 쌓임이 얼마인데 감히 비교하겠는가? 또한 풍부한 어휘는 깊고 넓은 지성에서 나오는 소산일 것이다. 단순히 영어 단어집 암기처럼 국어 단어만을 공부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갑자기 좋은 문장이 무엇인가로 얘기가 벗어나는 듯한데, 요는 이 책은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문장 자체가 참으로 좋아 우리글의 멋을 잘 알게될 기회도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갑자기 번역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이 샌다. 아무리 훌륭한 번역서도 이런 문장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국어로 쓴 문장을 다른 언어로 바꿀때 작가의 의도를 어찌 다 반영하고 그 뉘앙스를 전달할 수 있겠는가. 정수일 선생님의 이 책을 번역하더다로 이런 맛깔나는 문장을 옮길 수 없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의역이 들어가게 될 수밖에 없고, 의역은 원작자의 의도를 해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초원 유목민들...우리가 알려하지 않은>


기행문, 내가 기행문을 읽은 게 언제였던가 생각해보니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소개된 단편 기행문들이 전부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된 기행문을 읽어본 적이 있나? 아니면 지금 기억을 못하는 것일까? 그런면에서 이 책은 기행문의 진수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시중에는 에세이류의 기행문들이 많이 있다. 그러한 글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여행 중의 개인적 감상에 너무 치우쳐져 있는 면도 없지 않다는 생각이다. 나쁘게 말하면 현지 사람들과 괴리된 지나가는 나그네의 감상에 젖은 생각의 나열 말이다. 


이 책은 실크로드의 3대 루트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초원길 답사 기행문이다. 이미 오아시스길 탐방이 <실크로드 문명기행>(2006)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는데, 나는 두 번째 시리즈에 해당하는 초원길 책부터 손에 받아들었다. 대흥안령산맥, 몽골 지역, 러시아까지 이어지는 루트가 주요 답사코스였다. 그 답사 지역 현지 사람들의 삶과 유목민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어, 여행자의 감흥과 현지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잘 녹아 있다.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를 흥미있게 읽기 위한 전제가 있을 것 같다. 

우선 세계사의 흐름과 유목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은 있어야 한다.  책에는 탐방 지역에서 대한 풍부한 역사적, 문화적 해설이 실려있는데, 이 분야에 대해서 사전적 지식이 있다면 크게 도움될 내용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책에 등장하는 유목민족이나 나라들에 대해서 처음 접한다면 그들이 왜 그리 중요한지 모르고 지나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학원에서 유학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서양 중심의 미국사, 세계사를 가르치는데(미국 시험이어서 특히 더 그렇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들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특히 작금의 역사 서술이 지나치게 서양문명을 중심으로 보거나, 아시아를 중요시 하더라도 중국중심의 서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알다시피 고교 시절 우리는 중앙아시아의 역사나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거의 배우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들이 한국보다 못한 후진국으로 배우거나 가난하고 낙후된 사람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예를 들어 ‘흉노족’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흉측한 노비 같은 야만적인 족속’으로 생각해 버린다. 거란족이나 여진족 모두 한때 강성했으나 곧 망한 나라들 정도로 말이다. 


조선 시대에도 중국 한족 중심의 역사관에 치우쳐 후금 여진을 야만이라고 생각하다가 그들에게 처참하게 무너지지 않았는가? 과거는 한족 중심 역사관이, 현재는 서양 중심 역사관이 지금의 상황을  우리나라가 답습할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이 책은 제발 그런 생각을 버리라고 간곡히 말한다. .무엇보다도 문화적 다양성, 관용, 서로에 대한 편견없는 이해가 이 책의 큰 결말이다. 


읽으며 눈에 특히 와닿은 문구가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가 아니라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다. 맞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어쩌면 상대방에 대한 오해의 시작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상대방이 그저 강하다고 말들하니 강한 줄 알고, 약하다고 하니 약한 줄 알아 스스로 약자가 되거나 근거없이 강자로 군림하려 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려고 노력할 수야 없겠지만, 우리와 교류했던 이들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알려고 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북한과의 좋은 관계가 형성되어 정말 서울역에서 서유럽까지 기차로 갈 수 있게된다면 그 장대한 기차로드를 통해 만나게될 문화들이다. 

무작위 리스트를 작성하니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어쩌면 리스트를 작성하지 않았으면 ‘읽어봐야지, 읽어야하는데’라는 생각만 하면서 끝내 손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스트 덕분에 내 책장에 보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큰 일 날뻔했다. 이 책을 놓칠 뻔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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