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수일,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창작과비평, 2010.
실크로드에 관심이 많아 책이 출판되었을 때부터 사두었지만, 처음 몇 쪽을 읽고 선 책장에 꽂아두고선 잊었다. 그동안 꽂아두기만 한 게 죄송스러울 따름인 책이다.
올해(2019)에는 내가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지성대장정”이라고 거창한 ‘프로젝트’이름을 짓고, 그간 사두었던 책들을 읽어보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놓고 안 읽은 책, 또는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책들을 읽어보자는 심산이다.
하지만 이런 계획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읽을 책을 고르려는 순간 그때 그때의 내 감정, 기분에 따라 ‘선택받는 책’이 달라지고, 이러다 보면 분명히 끝내 읽지 않는 책이 생기리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해서, 나의 기분에 관계없이 무작위로, 또는 약간의 의무감으로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도서 리스트를 작성하기로 했다.
우선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보면서 책들의 제목을 주욱 넘버스 (맥컴퓨터의 엑셀 프로그램)에 기록했다. 130권이 나왔다. 그 다음은 어떤 순서로 읽느냐이다. 역시 내가 읽고 싶은 순서대로 책을 배치해놓으니 마음이 확 닿지 않는 책들은 자꾸 순번에서 뒤로 밀렸다. 안되겠다. 무작위이어야만 했다. 넘버스에 입력한 책 목록의 글자색을 흰색으로 바꿔 책의 제목을 가려버렸다. 그리곤 마구 뒤썩어 편집해버렸다. 게임카드를 무작위로 섞어버리듯이. 이렇게 해서 나도 모르는 책 순번 리스트가 정해졌다. 이제 책을 고를 때마다 순번이 앞선 책만 글자가 보이게 글자색을 변경했다.
‘이번에는 무슨 책일까?’라는 호기심이 발동한다. 기대감도 생기니 책 한권을 독파할 때마다 흥미가 생긴다.
그래서 첫 번째로 선택된 책이 정수일 선생님의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이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문장들>
첫 페이지를 열고 마지막 페이지를 닫을 때까지 우리 글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존경심이 절로 났기 때문이다. 여느 글들과 달리 편안하게 글줄을 따라갈 수 있었고, 읽는 나도 격조가 높아지는 느낌 마저 들었다. 문장의 진의를 흐리는 불필요한 꾸밈없이 단아하고 품위가 있는, 그러나 권위적이지 않은 글들에서 지은이 정수일 선생님의 깊은 연륜과 넓은 통찰이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처음으로 감동받은 글은 다들 좋아하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다. 그 후에는 거의 읽어보지도 못한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 그리고 최근에 읽은 바로 이 책이다. 물론 훌륭한 문장을 쓰는 분들은 많을 것이나 내가 읽은 독서량이 빈한하여 다른 뛰어난 글들을 아직 접하지 못했을 뿐이리라. 아마 읽고 또 읽다보면 이렇게 빼어난 글들을 많이 접하게 될 것이다.
책을 읽는 중에 무엇이 이렇게 좋은 문장을 만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풍부한 어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문장을 쓰면서 사용하는 단어가 몇이나 될까?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나 같은면 이런 단어를 썼을 것 같은데 도대체 이 단어는 어떻게 생각이 날까’라고 묻게 된다. 이런 의문은 사실 선생님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 살아온 인생의 쌓임이 얼마인데 감히 비교하겠는가? 또한 풍부한 어휘는 깊고 넓은 지성에서 나오는 소산일 것이다. 단순히 영어 단어집 암기처럼 국어 단어만을 공부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갑자기 좋은 문장이 무엇인가로 얘기가 벗어나는 듯한데, 요는 이 책은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문장 자체가 참으로 좋아 우리글의 멋을 잘 알게될 기회도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갑자기 번역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이 샌다. 아무리 훌륭한 번역서도 이런 문장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국어로 쓴 문장을 다른 언어로 바꿀때 작가의 의도를 어찌 다 반영하고 그 뉘앙스를 전달할 수 있겠는가. 정수일 선생님의 이 책을 번역하더다로 이런 맛깔나는 문장을 옮길 수 없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의역이 들어가게 될 수밖에 없고, 의역은 원작자의 의도를 해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초원 유목민들...우리가 알려하지 않은>
기행문, 내가 기행문을 읽은 게 언제였던가 생각해보니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소개된 단편 기행문들이 전부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된 기행문을 읽어본 적이 있나? 아니면 지금 기억을 못하는 것일까? 그런면에서 이 책은 기행문의 진수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시중에는 에세이류의 기행문들이 많이 있다. 그러한 글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여행 중의 개인적 감상에 너무 치우쳐져 있는 면도 없지 않다는 생각이다. 나쁘게 말하면 현지 사람들과 괴리된 지나가는 나그네의 감상에 젖은 생각의 나열 말이다.
이 책은 실크로드의 3대 루트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초원길 답사 기행문이다. 이미 오아시스길 탐방이 <실크로드 문명기행>(2006)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는데, 나는 두 번째 시리즈에 해당하는 초원길 책부터 손에 받아들었다. 대흥안령산맥, 몽골 지역, 러시아까지 이어지는 루트가 주요 답사코스였다. 그 답사 지역 현지 사람들의 삶과 유목민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어, 여행자의 감흥과 현지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잘 녹아 있다.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를 흥미있게 읽기 위한 전제가 있을 것 같다.
우선 세계사의 흐름과 유목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은 있어야 한다. 책에는 탐방 지역에서 대한 풍부한 역사적, 문화적 해설이 실려있는데, 이 분야에 대해서 사전적 지식이 있다면 크게 도움될 내용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책에 등장하는 유목민족이나 나라들에 대해서 처음 접한다면 그들이 왜 그리 중요한지 모르고 지나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학원에서 유학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서양 중심의 미국사, 세계사를 가르치는데(미국 시험이어서 특히 더 그렇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들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특히 작금의 역사 서술이 지나치게 서양문명을 중심으로 보거나, 아시아를 중요시 하더라도 중국중심의 서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알다시피 고교 시절 우리는 중앙아시아의 역사나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거의 배우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들이 한국보다 못한 후진국으로 배우거나 가난하고 낙후된 사람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예를 들어 ‘흉노족’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흉측한 노비 같은 야만적인 족속’으로 생각해 버린다. 거란족이나 여진족 모두 한때 강성했으나 곧 망한 나라들 정도로 말이다.
조선 시대에도 중국 한족 중심의 역사관에 치우쳐 후금 여진을 야만이라고 생각하다가 그들에게 처참하게 무너지지 않았는가? 과거는 한족 중심 역사관이, 현재는 서양 중심 역사관이 지금의 상황을 우리나라가 답습할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이 책은 제발 그런 생각을 버리라고 간곡히 말한다. .무엇보다도 문화적 다양성, 관용, 서로에 대한 편견없는 이해가 이 책의 큰 결말이다.
읽으며 눈에 특히 와닿은 문구가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가 아니라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다. 맞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어쩌면 상대방에 대한 오해의 시작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상대방이 그저 강하다고 말들하니 강한 줄 알고, 약하다고 하니 약한 줄 알아 스스로 약자가 되거나 근거없이 강자로 군림하려 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려고 노력할 수야 없겠지만, 우리와 교류했던 이들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알려고 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북한과의 좋은 관계가 형성되어 정말 서울역에서 서유럽까지 기차로 갈 수 있게된다면 그 장대한 기차로드를 통해 만나게될 문화들이다.
무작위 리스트를 작성하니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어쩌면 리스트를 작성하지 않았으면 ‘읽어봐야지, 읽어야하는데’라는 생각만 하면서 끝내 손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스트 덕분에 내 책장에 보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큰 일 날뻔했다. 이 책을 놓칠 뻔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