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람은 자기네 나라가 이제 진정한 인류평등주의 시대정신으로 무장한 민주주의 나라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하지만 사실은 조선시대 만큼이나 봉건적이고 차별적인 새로운 유형의 신분 제도 속에서 살고 있다. 나라 전체에 전통적인 고등학교 사회 모델을 적용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성공만 거둘 수 있다면 도덕이니 뭐니 다른 그 무엇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행동 규범을 따르는 모델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히 '체면'의 문제라고만 생각한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전형적인 고등학교에는 인기 있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 승리자와 패배자, 쿨한 아이들과 얼간이 같은 아이들이 있다. 쿨한 아이들이 사회적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차지하는 이유는 남다른 개인적 속성 때문이다. 이들은 돈이 많거나, 옷을 잘 입거나 외모가 빼어나거나, 운동을 잘 하거나, 카리스마나 사교술이 뛰어나다.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그 밖의 아이들은 모두 패배자나 얼간이가 되어 피라미드의 중간과 아래층을 형성한다.-16쪽
그 가운데 상당수가 자기네의 열등한 사회적 지위에 불만을 품는다. 또래 집단의 비합리적인 압력 때문에 그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지며, 결국 나도 쿨한 아이들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그들을 모방하게 된다. 그래서 쿨한 아이들의 옷차림과 장신구를 유심히 봐 두었다가 똑같은 것을 사지만, 그 무렵이면 이미 쿨한 아이들은 다음 유행으로 넘어가 있으며 이런 덜 떨어지고 느려터진 아이들을 더욱 한심하게 생각한다.
이런 악순환은 영원히 되풀이되며, 그 와중에 도저히 외모가 받쳐주지 않거나 사교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아이들, 혹은 남들을 따라가는 데 필요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아이들은 그 게임을 완전히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몇몇 계몽된 반항아들은 고등학교 사회의 천박한 외피를 꿰뚫어보고 원칙적으로 그것을 거부해 보지만 그 즉시 왕따가 되어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거나 심지어 어제의 패션을 좇아가기에도 급급한 얼간이들보다 더 열등한 인간이 되어버린다. -17쪽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실 세계로 들어서면 금방 철이 들어서 고등학교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는다. 고등학교 때 쿨한 친구라는 소리를 듣던 사람들 대부분이 사회에 나와서는 패배자로 전락한다. 그들은 좋은 직장을 얻을 만큼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고, 현실 세계 사람들은 그들의 알량한 껍데기에 현혹되기에는 너무 바쁘고 인내심도 없다. 반면에 고등학교 때 패배자나 병신 소리를 듣던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서는 승리자가 된다.
-18쪽
하지만 한국에서는 고등학교가 고등학교로 끝나지 않는다. 20대 중반이나 후반, 심지어는 30대와 40대, 그 이후까지 이런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정치인이나 재벌 일가, 연예인 가운데 상당수는 죽을 때까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다. 이런 모델이 사회 전체의 기초로 작용하는 것은 정말 유치하고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성형외과 의사나 화장품 회사, 패션 디자이너나 휴대전화 제조업체, 고급 자동차 딜러에게는 아주 이상적인 비즈니스 환경을 제공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들을 손에 넣고자 어렵게 번 돈을 내놓게 하려면 영혼이야 파괴되건 말건 당장 사지 않으면 미칠 것처럼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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