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 똑똑한 사람들은 왜 민주주의에 해로운가
마이클 린치 지음, 황성원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메디치미디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메디치미디어로 부터 책을 받아들었다. 책을 받아들고 완독한지는 몇 일 지났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조금 늦게 후기를 쓰게 되었다. 개인적 총평이라면 '하루에 유튜브를 2시간 이상 시청하는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책' 정도 일 것 같다. 또한 필자는 이 책을 2020년을 살아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이라면 읽어보길 권하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날의 시대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과 뉴스는 보지 않고, 이제는 자신의 기호에 맞는 '진실'을 취사 선택할 수 있게 된 시대다. 우리는 왜 사실(Fact)을 '가짜뉴스(Fake News)'로 치부하고, 우리의 정치적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하지 못하고 서로를 비방하는 사회에 살게되었는가? 마이클 린치 교수의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Know it all society)>는 한국사회에서 촛불과 태극기 사이에서 거대한 심연을 느끼고 고민하는 '회색'의 독자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할 것이다. 기호식품으로 변해버린 진실은, 기후변화와 백신, 최근 부정선거의 논란과 같은 '사실'의 문제까지 '믿음'의 문제로 바뀌어 버렸다. 특히나 인간 사회 어느 곳이든 뿌리내리는 파벌주의의 덫이 21세기에 들어서 더욱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는가에 대해 경종을 울려주는 책이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사실에 의존하는 '진리'라는 개념은 이제껏 철학자들이 겸손이라는 필수 요소를 가르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자만심을 억제하는 이런 장치가 제거될 때 일종의 광기를 향한 길로 한발들이게 된다. 그것은 피히테와 함께 철학에 난입한 권력에의 도취이자, 철학자는 아니든 현대의 인간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나는 이런 도취가 우리 시대 최대의 위험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거기에 기여하는 철학은 엄청난 사회적 재난의 위험을 키우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사실 '노잇올(know it all)'의 핵심적 특징은 명백하게 사회적이다. '노잇올'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울 게 전혀 없다고, 자신의 세계관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임으로써 더 나아질게 없다고 생각한다. - p.39


저자소개
마이클 린치(Michael Patrick Lynch)
코네티컷 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자 코네티컷 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소장이다. 뉴잉글랜드 인문 컨소시엄 소장을 맡고 있으며 인식론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자 '다원주의 진리론'의 옹호자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으로서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저서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사실적인: 왜 진리가 중요한가>, <맥락속의 진리(Truth in Context)>, <이성 예찬(In Paraise of Reason)> 등 많은 저서가 한국을 포함해 여러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1. 몽테뉴의 경고

 최근에 '꼰대'에 대한 소재로 유머와 풍자가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머와 풍자가 무색하게도 우리 주변에는 여러 유형의 꼰대가 존재한다. 자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경험해 봤으며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부류다. 자부심과 자신감은 우리 삶의 중요한 원동력이지만 그들의 주장은 허용수준을 이미 벗어나 있다. 최근에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16세기에 태어난 몽테뉴는 일찍부터 이러한 인간들의 군상에 대해 연구한 바 있다. 인간은 왜 오만해지고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인가? 우리 주변에는 과도한 파괴적 나르시스트들이 자신들의 사익을 공동선으로 포장하고 있다. 

몽테뉴는 이미 1800년 전에 지혜에 이르는 길은 자신을 아는 데서 시작한다고 조언했던 소크라테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델포이 신탁은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는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는 단 한 가지 사실은 자신이 많이 알지 못한다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중략) 하지만 몽테뉴가 진짜로 매달렸던 대상은 피론학파(Pyrhonism)라고 하는 약간 다른 집단이었다. 이들은 고대의 회의론자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실제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라고 주장했다.
- p.24

오만함의 씨앗은 인생의 초기에 심긴다. 몽테뉴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 모습으로 '옥수수자루'를 들었다. 옥수수는 어려서 머리가 비었을 때는 당당하고 꼿꼿하게  서 있다가 나이가 들면서 머리가 꽉 차면 겸손함으로 고개를 떨구는데, 이를 이상적 성장 패턴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몽테뉴는 현실에서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몽테뉴와 고대의 회의론자들은 자신의 지식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은 그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해당한다고 봤다.
- p.28

데이비드 흄은 "행운은 보통 용감하고 진취적인 사람에게 호의적이며, 자신에 대한 훌륭한 평가만큼 용기를 고취하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부심(self-esteem)이야말로 모든 성공하는 인무르이 필수 요소이자 마음가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 뻔한 말이 우리 시대에는 거창한 해방의 좌표로 받아들여졌다. 1970년대부터 교육계에서 일어난 '자부심 운동'은 학생의 자아 개념을 문제 삼으며 어떤 식으로든 다르거나 창의적이거나 백인이성애 중심에서 벗어난 이들을 조롱하던 이전 문하에 대한 반동이었다. 이 새로운 접근법은 비판보다는 칭찬과 성취를 강조했다. 좀 더 최근에는 '투지(grit)'라는 연관 개념에 매혹되는 경향도 나타난다. 
- p.34


2. 분노 공장

팩트 체크(Fact check)라는 말이 우리 곁에 친숙히 자리잡은 것은 그만큼 가짜뉴스로 인한 선전과 선동이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팽배하기 때문이다. 책에서 마이클 린치 교수는 진실의 왜곡과 편향된 정서전달 등이 우리 역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장에서 저자는 첨단의 시대를 달리는 현대인들이 어떻게 확증 편향을 더욱 강화해가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것을 사실의 영역으로, 또한 어떤 것을 판단의 영역으로 분류하고 있는지, 소셜미디어를 통해 '학습'된 분노가 공유되는 세상, 이 뒤틀어진 진실의 공유(리트윗)에 대해 저자는 아래와 같은 화두를 던지고 있다.   

구글을 통한 앎에 의존하는 것은 자신이 아는 것을 과대평가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경향을 살찌운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기기 덕분에 우리는 손가락(또는 엄지) 끝으로 정보의 바다에 접근할 수 있다. 심리학자 매슈 피셔(Mathew Fisher)가 인터넷 검색과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착각'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밝혀냈듯, 우리는 손에 스마트폰이 있으면 더 박식하다고 느낀다.
- p.48

하지만 구글을 통한 앎에서 그리고 지난 10년간 우리의 온라인 생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구글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정보를 주느냐가 아니라 구글이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 정보를 준다는 점이다.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은 사실 우리의 인터넷(Internet of Us)이다. 우리의 손가락은 우리가 원하는 사이트를 방문하고, 원하는 앱을 사용하며, 원하는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도록 페이스북 경험을 조심조심 공들여 만들어내면서, 분주하게 우리의 온라인 생활을 책임진다.
- p.49

디지털 플랫폼의 선호 추척 방식은 우리의 점점 심해지는 '노잇올리즘(know-it-all-ism)에 한몫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심지어 명백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것은 인터넷에 독자적인 어두운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인터넷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을 강화함으로써 자신이 아는 것을 부풀리는 인간의 경향에 양분을 공급한다. (중략) 마키아벨리(Nicolo Machiavelli)는 군주는 항상 기만할 준비가, 그것도 과감하게 그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미국 뿐만 아니라 해외의 여론을 흔들기 위해, 세네카(Seneca) 인디언이 영국과 맺은 동맹에 대한 거짓 이야기를 분명하게 주입했다. 
- p.50

데이비드 흄의 유명한 철학적 금언 중에 '이성(reason)은 정념(passion)의 노예' 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이성이 우리에게 정해진 장소에 어떻게 도달할지를 알려주기는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는 알려주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목적지를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심장뿐이고, 이성은 그 수단을 쥐어준다. 
- p.58

우리가 하지 않은 행동부터 시작해보자. 최근의 연구에 다르면 온라인에 공유된 뉴스 중 최소 60퍼센트가 그것을 공유한 사람마저 읽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중략) 공유된 기사는 280만 건, 잠재적인 조회 수는 750억 회였고, 클릭 수는 약 1천만 번이었다. 연구자들은 이 상관관계를 파악하고 편향을 수정하는 방법론을 설계한 뒤, 뉴스기사를 트윗한 사람 열명 중에서 실제로 그 기사를 읽은 사람은 네 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중략) 사람들은 기사를 읽기보다는 공유하는데 더 관심이 있다.
- p.65~66

디지털 플랫폼은 감정적인 정서를 전달하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랫폼 설계자들은 이런 정서가 특정 포스트가 얻는 관심의 양을 증대하고 재공유 횟수를 늘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어떤 결과를 낳든 그것은 돈이 된다.
- p.71


3. 삽이 휘는 곳

기후변화에 대해서도 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가? 왜 좌파 성향의 미국인들은 과거 소련 정부를 더 상냥한 정부로 인식하였는가. 미국에서는 이제 오래되다 못해 퀴퀴한 느낌마져 풍기는 좌, 우의 대립의 문제도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진행형인 만큼 왜 사람들은 진영에 따라 다른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장이었다.

다른 어떤 철학자보다도 확신에 대해 많이 생각한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확신이 어떻게 오만함의 무의식적인 엔진이 되는지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그러나 간과하기 쉬운 지점을 언급했다. "모든 확신에는 역사, 즉 전조와 모험과 실수가 있다" 라고 니체는 말했다. "확신이 아닌 상황을 겪은 뒤에야 그것은 확신이 된다.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단순한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 적당한 환경을 만나면 가장 깊은 곳에서 정체성을 반영하는 가치가 뿜어나와 온갖 화려함을 뽐낸다는 것이다.
- p.95

문제를 정치화하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사실의 문제가 확신의 문제로 바뀌는 경우다. 기후변화를 둘러싼 논쟁을 생각해보자. 표면적으로 기후변화의 원인을 둘러싼 질문들은 교량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둘러싼 질문들과 유사하다. (중략) 미국인들은 이 문제를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보수주의자는 기후변화가 중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반면, 자유주의자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p.97

완전히 다른 예를 들자면 20세기 중반 일부 좌파 성향의 미국인은 소련이 미국 정부가 주장하는 것보다 더 상냥한 곳이라고 믿었고,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썼다고 생각했다. 일부는 스탈린의 숙청과 강제노동수용소, 체코슬로바키아와 다른 곳에서 자행된 반대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소식을 접하고는 이 믿음을 폐기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소련의 억압과 관련된 이야기를 합리화했다. 
- p.104


4. 오만함이라는 이데올로기
 
트럼프 시대를 만든 오만함의 이데올로기를 탐사하는 장이다. 혹자는 트럼프의 트위터를 가짜 뉴스를 양산하는 공장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트럼프가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트럼프가 주류 미디어가 다루지 않는 사안을 던져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트럼프의 트윗 하나하나에 열광하게 된다. 

권위주의 성향의 통치자는 겉보기에는 양립 불가능할 것 같지만 사실상 서로를 강화하는 두 가지 태도를 배양한다. 첫 번째 태도는 현실이나 상상속의 박해 때문에, 즉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떤 인종이나 파벌이나 문화가 위협을 받고있다는 생각 때문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히틀러의 관점에서 '문화'는 아리아인의 문화였고, 파벌은 아리아 인종이었으며, 위협은 토지와 식량 생산이 두려울 정도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두번째 태도는 파벌의 타고난 우월함에 동반되는 감각이다. 히틀러의 경우 우월함이란 인종의 우월함이었다. 인종이든 다른 무엇이든 거의 모든 경우 이 우워람은 역사를 통해 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 p.115

오만함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불안한 자, 방어적인 자의 이데올로기이다. 사실 앞에서 말라 죽을까 봐 겁이 나서 진실에 적개심을 품을 수 밖에 없는 이데올로기다.
- p.118

행정부 안팎에서 트럼프에 반대하는 보수 인사의 존재는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많은 보수적인 지식인, 로스 두닷(Ross Douthat)에서부터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 아서 브룩스(Arthur Brooks), 조나 골드버그(Jonah Goldberg)등이 트럼프와 그 추종자가 옹호하는 국가주의적인 정치를 정치적 보수주의와 구분하는 데 열을 올렸다. 사실 좀 더 전통적인 보수주의와 내가 다루고 있는 오만함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구분은 중요하다. 아직도 문화적 서사를 둘러싼 전투 중에 있기 때문이다. (중략) 중도 보수주의자와 달리, 많은 극우 인사는 내가 보기에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들은 오만함의 과즙을 빨아들였고 진실의 왜곡을 친구로 삼는다. 좋은 예로 초보수적인 대의와 관련된 사실상의 모든 폭력 행위가 벌어진 뒤에 불쑥 등장하는 음모론을 들 수 있다. 
- p.137~138


5. 자유주의와 정체성의 정치

오크숏은 자유주의자의 태도가 위험할 정도로 순진하다고 보았다. 문제는 전통을 넘어서면서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설 수 있다는 암묵적인 가정이었다. 하지만 오크숏이 보기에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앎이란 항상 전통, 관습, 생활양식이라는 맥락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 p.179

오늘날의 진보적인 자유주의자(이론이 아니라 사람들)는 그저 자유주의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수주의자보다 더 합리적인가? 또는 더 똑똑한가? 이 새로운 질문이 곤란한 이유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자신의 파벌이 더 많이 안다는 자아개념은 그것이 맞든 틀리든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칫하다가는 진실에 대한 전념을 자신의 우월함에 대한 전념과 혼동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 p.186 

당신에게 사람들이 당신의 정치적 관점을 믿게 만들 수 있는 약이 있다. 당신은 그걸로 뭘 할 것인가? 인종주의자 삼촌에게 줄 것인가? 지역 국회의원에게 보낼 것인가? 상수원에 넣을 것인가?
- p.191


6. 민주주의와 확신의 문제

조지오웰(George Orwell)의 <1984>의 주인공 윈스턴은 2+2가 5라고 동의할 때 까지 사상경찰 오브라이언에게 고문당한다. 당이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 말고는 진실이 존재하지 않음을 강요하는 것이다. 우리가 파벌적 오만함과 뒤틀어진 확신의 확산을 중지시켜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실함과 겸손의 사회, 객관적 진실에 대해 건전한 의심을 할 수있는 수준의 민도를 달성하기란 정녕 어려운 것인지, 또한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 개방적인 태도를 우리 사회에 심어낼 방법은 없을지? 마지막 챕터에서 건전한 자유민주주의와 성숙한 시민사회의 이상이 얼만큼 우리 가까이에 와있는지 돌이켜 생각해보게 되었다. 

첫 번째 교훈은 이 책을 관통하는 꾸준한 주제였다. 그것은 바로 진실을 진지하게 추구하려면 일단 우리 자신의 인지적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모든 걸 알지 못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편견과 추정에 입각한 것일 수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중략)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알기 위해 최소한 노력은 해야한다고, 노력 자체가 정치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혼자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에게 탐구는 변증법적이었다. 앎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비롯될 것이다.
- p.2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중요한 지적을 했다. 중대한 반대 의견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진실을 추구하는 방법이라는 점을 말이다. 가령 그것은 어떤 정책에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증거를 제기함으로써 합리적인 설득의 형태로 기능할 수 있다.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에서부터 카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반체제 인사들이 소책자, 에세이, 편지, 책, 블로그 포스트를 이용해서 아직 설득할 만하다는 희망을 품고 있는 대상들을 향해 힘 있는자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 p.217~218


- J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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