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그레이엄 - 월가의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 회고록
벤저민 그레이엄 지음, 김상우 옮김 / 굿모닝북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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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Jake 평점: ★★★★★

 

벤저민 그레이엄(Benjamin Graham, 1894~1976)을 포스팅 한다는 것 만큼 뜻 깊은 일이 있을까? 이 글을 통해 전설적인 투자자인 워렌 버핏(Warren Buffett)의 스승으로 알려진 이 위대한 사상가이자 증권분석가, Dean of Wall Street로 불린 그레이엄에 대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친숙해진다고 한다면 그보다 더 뿌듯한 일도 없을 것이다. 벤저민 그레이엄의 자서전에 대한 '서평'의 구색을 갖추고 포스팅 하고자 한다. 특히 그의 업적이나 능력보다는 초, 중년시절 삶과 내면적인 부분에 집중해보고자 한다. 업계에 아주 짧은 기간 몸담은 것에 불과한 필자가 그의 성과를 평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고 솔직히 고백하면서 짧은 글을 시작한다.

 

 

1. CFA와 그레이엄

CFA의 설립배경에 벤저민 그레이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분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국제재무분석사(Certified Financial Analyst : CFA)라는 민간 자격시험에 도전할 수 있게 된 것의 상당한 공헌을 한 사람이 벤저민 그레이엄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자서전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그는 실제로 공인된 증권분석자격의 필요성과 월스트리트에 필요한 엄중한 금융윤리(Financial Ethics)에 대해 강한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CFA제도가 자리잡을 때까지 실제로 20여년간 CFA를 후원했다. 1962년에 증권분석사를 전문직화 하기 위한 노력으로 재무분석사 연합(The Financial Analysts Federation)을 설립하는데, 이것이 훗날 투자관리 및 연구협회가 되고 이 협회가 재무분석사에게 시험에 의한 자격증을 부여하게 된다. 그의 자서전 6장에서 그가 월스트리트를 경험하기 시작한 시작점에서 겪었던 놀라운 경험에 대해서 이렇게 밝힌다.

 

나는 금융계가 큰돈을 대충대충 처리하는 방식에 놀랐다. 수표를 확인하고 돌려줄 때 쯤에는 창구직원이 "뉴버거" 혹은 "컨텐트(Content, 예스라는 의미)" 또는 다른 말을 외쳐대고는 했다. 심부름꾼 한 명이 창문 위에 올라가 "뉴버거 수표"라고 말하면 50만 달러짜리 수표가 신분 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로 그의 손에 넘겨졌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주식증서의 즉석 발급이었다.(중략)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런 말도 안되는 시스템에서도 수표나 증권증서가 분실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벤자민 그레이엄 자서전

 

2. 가정사

그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난 이듬 해에 그의 가족은 뉴욕으로 이주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업 때문인데, 꽤 유능했던 무역상인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생활을 하던 그레이엄과 그의 두 형, 어머니는 9살 쯤 되던 1903년에 아버지의 사망으로 급격하게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된다. 어머니는 1944년에 친구들과 모임을 하고 귀가하던 중 노상강도에게 피살된다. 그는 첫 부인인 헤젤과의 이혼 뒤에도 캐롤, 에스텔 이라는 두 여인과 두 차례의 재혼으로 관계에서의 아픔이 많은 사람이다.

 

 

어머니는 매우 긍정적인 성격이고 사교적인 사람이었으나 사업수완은 없었기 때문에, 그의 형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크고 작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랐다. 막내였던 베니(그레이엄의 애칭)는 초등학교와 중~고 시절을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그는 밖에서 운동하거나 놀기 좋아하던 형들과는 달리 집에서 책을 읽거나 사색하기를 좋아했고, 작은 체구와 남에게 피해끼치기 싫어하는 성격때문에 일찍부터 공부에 매진했다. 그래서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장학금을 타기 위해 노력했는데 2등이 되거나 아주 약간의 차이로 장학금을 수령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방학 중에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농장에서 두 달간 숙식하며 농장일을 할 정도로 그는 어린 시절에 많은 경험을 했다.

 

 

나는 13세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고, 덕분에 얼마되지 않는 돈을 벌 수 있었다. 나는 석탄난로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무거운 석탄재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지하실 계단을 올라와 도로의 저지대에 쏟아버리면 허리가 뻐근했지만 이 순간을 제외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또 우리집이 있는 길의 모퉁이에서 몇 집 떨어진 곳에 살던 베론디스라는 이름의 소년에게 수학을 가르쳤다.(중략)

-벤자민 그레이엄 자서전

 

3. 학창시절

그는 미국의 명문대학인 컬럼비아 대학의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생활을 할 것으로 보였으나, 장학회의 착오로 수령자 명단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그는 광고 세일즈맨, 영화관 매표원, 전화기 조립공등의 일을 하며 1년의 시간을 보낸다. 1년 뒤에 수령자 명단 제외가 착오 였음이 드러나고 본래 수령해야 했던 퓰리쳐 장학금이 아닌 컬럼비아 대학 동창회에서 제공하는 전액 장학금과 함께 더 나은 대우로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를 불행한 경험으로 회고하면서도 당시의 컬럼비아 대학 학장인 케펠씨가 했던 격려로 그의 고생이 헛수고는 아니었음을 회상한다. 어찌되었건, 그레이엄이 컬럼비아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졸업한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졸업 전 후로도 상당히 다양한 일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월스트리트에 도입한 증권분석이라는 개념은 순전히 다양한 경험들로 인해서 생겨난 것이 아닌 그의 학문적인 관점과 학교 교육, 스스로 탐구하는 습관때문이라고 정리한다. 우리는 투자라는 분야에서, 업계에서 겪었던 다양한 경험만큼이나 중요한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평소 갖고있는 탐구심과 성찰임을 알게된다.

 

내가 월 스트리트에 도입한 것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적용 가능한 근본적이고 학문적인 관점이었다. 나는 학교 교육 덕분에 스스로 탐구하고 생각하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이 같은 장점들에다 통상 이론적 경향과 관계없는 다른 두 가지를 보탰다. 첫 번째는 어떤 문제나 상황 속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분별해 내는 동물적인 본능과 비본질적인 것에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특성이다. 두 번째는 현실적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완수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며, 특히 새로운 접근방법과 기술을 개발해내는 능력이다.

-벤자민 그레이엄 자서전

 

그러나 그가 학부시절 경제학과 경영학에 매진했는지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는 필자에게도 큰 놀라움을 주었다. 그가 집중적으로 수강했던 과목들을 살펴보면 한국의 학생들이 추구하는 가치관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수학과 문학, 철학과목을 집중수강했고 성적 또한 뛰어났던 덕분에 교수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게 된다. 그는 졸업을 앞두고 컬럼비아 대학의 로스쿨에 1년 장학생에 선정되었으니 이를 받아들일지의 여부를 알려달라는 통보를 받기도 했으며, 철학과 과장인 우드브리지 교수로 부터 철학과 교수제의와, 얼마뒤 수학과 호크스 교수로부터 수학괄르 대표해 교수직 제의를 받게된다. 명문 대학에서 이러한 제의를 받을정도로 학문적인 자질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오랜 가난으로 인해 겪은 어려움 때문에, 학문적인 성과로 이룰 수 있는 명예보다 실질적인 보상을 따르게 된다. 그는 학장의 추천으로 "뉴버거, 헨더슨 & 룁(Newburger, Henderson & Loeb)" 이라는 증권중개회사에 입사하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이 많은 제의에 대해 기쁨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케펠 학장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라고 내게 조언했다. 그는 유능한 대학생들을 상아탑의 학문적 삶 속에 가둬놓기 보다는 제계로 내보내려는 강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나의 삶을 인도하는 일에 어떤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벤자민 그레이엄 자서전

 

 

4. 커리어

그가 증권분석사로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시기는 1919년부터 1929년 사이이다. 이 당시는 오늘날의 금융감독체계와 연례보고서(Annual Report)개념이 흐릿한 시기였으며 매우 약식의 대차대조표가 작성되는 시기였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기본적 분석을 실시하지 않던 시기이다. 1920년 무렵에 뉴버거, 헨더슨 & 룁의 주니어 파트너가 되면서 본격적인 채권 중개 및 증권분석을 시작한다.

 

 

학창시절 나는 다양한 분야에서 열 가지도 넘는 파트 타임 일을 했다. 그러나 월 스트리트에서 나의 경력은 오직 두 가지 뿐이었다. 하나는 처음에 들어간 중개회사에서 일반직원으로 일한 뒤 주니어 파트너가 된 것이었다. 또 하나는 내가 시작한 사업의 사장이었다. 나는 독자적인 사업을 싲가하기 전에 <월스트리트 매거진>의 금융 분야 필진이 되기 위해 중개회사를 떠나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꼈다. 글쓰기는 내가 좋아했던 일이었고 <월스트리트 매거진>의 금융 필진으로 일하는 것은 "문학"과 금융을한데 묶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내가 뉴버거, 헨더슨 & 룁에서 "파트너들" 에게 나의 이 같은 잠정적인 결정을 통보했을 때 그들은 나를 설득해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

-벤자민 그레이엄 자서전

 

이후 1923년에 새로운 사업으로 그는 "그레이엄 코퍼레이션(Graham Corporation)" 이라는 법인을 설립한다. 고작 29살의 나이였다. 지금 관점에서 볼 때는 상당히 어린 나이에 자신의 회사를 세운 것이다. 물론 한국 정서를 반영하자면, 그가 대학에 일찍 입학한 것과 군복무 기간을 제하고 나면 우리나라 수준에서 대략 32~34세 사이에 회사를 설립한 것으로 보면 된다. 회사 설립당시에도 월스트리트의 기준으로 그는 부자가 절대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그레이엄 코퍼레이션는 2년 6개월간 운영된 후 청산했으며 높은 자기자본 이익률을 달성하며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다. 그가 이러한 중대한 결정을 내린이유중 하나로 그가 읽었던 버나트 M. 바루크의 회고록 제 1권을 인용한다. 버나드의 회고록에는 버나드 바루크가 중개회사를 그만두고, 일반 대중과의 접촉이나 그들에 대해 아무런 의무감도 갖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계좌만을 증권시장에서 운영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레이엄은 바루크가 자기 계좌로만 거래하겠다는 다짐을 수치스럽게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회사를 설립하겠다는 결정이 버나드와는 다른 것인지, 또한 명예로운 것인지 고민한다.

 

 

1923년 7월 1일 나는 주당 12달러의 급여로 뉴버거, 헨더슨 & 룁에서 일한 지 정확히 9년만에 구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후회 없이 변화를 선택했다. 나는 오랫동안 중개회사가 오로지 고객의 피해를 대가로 번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개업무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으며, 그런 생각으로 인해 내 감정도 바닥을 기고 있었다. (중략) 그러나 내가 내렸던 결정은 바루크보다 더 명예로운가? 나 역시 오직 돈버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적어도 일반 대중들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을 주고 있던 중개회사를 떠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돈을 필요로 하는 친구와 친척들을 위해 상당한 수익을 올려주었다.

-벤자민 그레이엄 자서전

5.

새로운 회사의 설립, 워렌 버핏과의 만남

제롬 뉴먼과 함께 설립하는 그레이엄, 뉴먼 파트너십이 1925년 설립된다. 그레이엄이 은퇴할 때 까지 31년간 유지되는 이 회사에 1954년 어린 워렌버핏이 채용된다. 제롬 뉴먼과는 원만한 관계였으나 개인적인 긴밀한 친분이 아닌 철저히 동업자적 관계로 유지되면서 30여년간 운영되었던 것이 놀랍다. 그레이엄은 업계에서 수 많은 지인들과 친분을 가졌고 또 꽤 인기있는 인물이었으나 정작 절친한 친구는 거의 없었다. 그만큼 조심스러웠으며 사려깊었지만 상대방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소극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레이엄에게 워렌 버핏은 아주 적극적으로 들이대었는데, 그를 채용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결국에는 마음이 약해져 버핏을 고용한다.

 

다시 한번 내 성격상의 주요 결점 중 하나인 어떤 무덤덤함으로 인해 제리(제롬 뉴먼)와 나는 막역한 친구가 되지는 못했다. 우리는 늘 최상의 조건에 있었지만 실제로 일하는 시간 외에는 거의 서로를 보지 않았다. (중략) 나는 뉴욕주와 코네티컷주의 경계에 위치한 그들의 시골별장에서 며칠간을 보낸적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한 시간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또 우리는 함께 여행을 가지도 않았다. 각자의 사생활에 대해 거의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벤자민 그레이엄 자서전

6. 그가 들려주는 재미있는 일화

논외로 잠시 이야기하자면, 자서전에서 등장하는 일본인 투자회사 직원 "미키 준키치"씨와의 일화를 보면서 여러가지 기분이 들었다. 이제 막 1차세계대전이 끝난 당시에 벌써 일본의 증권거래소 두 곳에서 그레이엄 회사의 영업 방식과 기법을 배우기 위해 사찰단을 보내기도 했고, 일본의 후지모토 증권사와 그레이엄의 회사는 채권을 거래하고 있었으며, 뉴욕에는 요코하마 정금은행(Yokohama Specie Bank)이라는 일본 정부 소유의 금융기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내에도 증권회사는 60년대 부터 있었지만 한국의 유가증권시장이 1980년대에 비로소 태동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한국의 금융업계가 매우 늦은 시기에 발돋움했다는 것을 실감한다.

 

 

7. 끝맺으며

그는 에필로그에서 63세 때의 본인의 자화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조심했으며, 자신을 끔찍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아무생각 없이, 또는 악의를 가지고 그에게 종종 상처를 입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는 마음의 장벽을 쌓기 위해 비버처럼 노력하기 시작했다.

-벤자민 그레이엄 자서전

 

 

그의 명저인 <증권분석>, <현명한 투자자>, <비축과 안정>, <재무제표의 해석> 외에도 그가 쓴 몇 개의 희곡 작품과 수 많은 시들을 통해 사업적, 학문적 성과를 칭송하기 이전에, 우리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고난과 역경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세상을 헤쳐나간 끈기있는 인간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려운 가정 환경을 극복하며 출중한 능력으로 컬럼비아 대학을 최우수로 졸업했던 비범함 뒤에 있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 평범한 필자와 여러분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항상 용기를 주는 나의 영웅, 벤저민 그레이엄의 말 한구절로 포스팅을 마무리 하고 싶다.

 

 

"투자는 IQ와 통찰력 혹은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과 태도의 문제이다"

- Benjamin Gra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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