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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긴 만남을 위한 짧은 소설
2019년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자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트케의 작품성은 오래도록 인정받았으나 그가 가지고 있는 전범 옹호 경력은 심각한 논란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관객 모독』이 단지 언어극이라면 그의 발언은 현실 세계에서 소수 민족을 언어로서 모독했다. 그렇지만 노벨위원회는 문학적·미학적 기준에 따라 선정했다는 변을 남기며 문학적 우수성을 정치적 배려와 비교해 헤아릴 수 없다고 설명했다. 상을 받게 된 한트케는 자신의 선정이 정말 놀라운 일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그는 10년 전쯤에도 발언의 비윤리성 탓에 수상 거부 비슷한 일을 당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밀로셰비치의 장례식에 참석해 조사를 읽었던 그이지만 적어도 논란이 될 발언을 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건 알게 된 걸로 보인다.
한트케의 작품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짧은 편지를 받은 남성의 긴 일인극으로 시작한다.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이제는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라고 쓰인 편지를 함께 읽은 것치고는 그 대가가 혹독하다. 이 남자는 편지를 받아들고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뉴욕에 도착해 그녀를 찾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필라델피아로 떠난다. 그래도 '그러다 보니 잔뜩 압축된 채 점점 세차게 요동치는 도시가 평온한 대자연으로 보이기 했다'(p. 50)와 같은 묘사 덕분에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호텔 마크인 도마뱀을 보고나서 마침내 선언한다. "나는 이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아."(p. 61)
싱글 맘 클레어 메디슨과 아이를 데리고 함께 여행을 떠나며 비로소 글의 주제가 드러난다. 주인공은 클레어를 관찰하고 아이를 돌보고 떠난 유디트를 기억하며 『녹색의 하인리히』를 읽는다. 유디트는 말을 남기진 않지만, 주인공이 남긴 발자취를 확인한다. 유디트가 짧은 편지는 악몽에서 깨어난 채 '잠든 클레어의 몸속으로 돌진해 들어'(p. 109)간 이후 기진맥진해 잠들 때야 끝난다.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할 때 시작한 긴 이별은 주인공이 타인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찾아냄으로써 이루어진다.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사물들의 이름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나는 이제껏 내가 얼마나 나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져왔는지를 깨닫게'(p. 121) 되는 식이다.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알게 되면서 그는 밤보다 낮을 더 기다리게 되고 유디트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내가 그녀를 때려 죽일까봐 두려웠어." (p. 130)
주인공이 차츰 그녀를 잊었고 그녀가 지금 이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더이상 하지 않을 때 유디트는 찾아온다. 클레어와 여정을 마치고 마지막 남은 돈을 다 쓰고 서정성이 담긴 『녹색의 하인리히』를 다 읽었을 때 유디트를 만난다. 총성이 울려퍼지며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황이 전개된다. 주인공과 유디트는 존 포드를 만나 미국인들이 사용하는 특이한 인칭 문화, 그들의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며 책은 끝난다.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p. 204) 글쎄, 이 결말은 꿈일까 실재일까.
한트케의 작품들은 일찍이 직접 말하면서도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을 표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역시 그저 지리멸렬한 이별의 과정을 다루기 위해 쓴건 아닐 것이다. 한트케 자신도 작품을 '한 인간의 발전 가능성과 그 희망'을 서술하려 했다고 말했지만, 행간에 드러나는 의미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오스트리아 국적의 작가로서 미국을 횡단하는 이야기를 쓴 한트케는 꾸준히 클레어와 대화를 통해서 미국과 유럽의 문화적 차이를 강조한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우리'라는 말의 관습적 사용에 대해 존 포드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함께하는 공적인 행동의 한 부분으로 작용하기 때문일 겁니다."(p. 196) 한트케는 개인과 집단의식의 공유에 더 많은 집중을 요구한다. "다른 한편으로 당신네들은 서로를 모방하면서 스스로를 숨기려는 경향도 있더군요." 존재 간의 연결성을 인정하지 않으나 내면에 체화한 유럽인들을 지적하며 우리가 집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개인이라는 걸 강조한다. 극 내내 이어지던 『녹색의 하인리히』역시 그 책의 저자 고프리트 켈러의 개인적 경험이나 주인공만의 공감이 아니라 클레어와 공유를 통해 공공성을 획득한다.
한트케가 '왜 밀로셰비치를 옹호했는가?'를 찾아보며 읽은 글 중에 인상적인 그의 인터뷰가 있었다. 유고 전쟁에서의 학살은 밀로셰비치만 저지른 것이 아니며 반대로 나토군에 의해서도 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다는 설명이었다. 한트케가 볼 때 전쟁이라는 건 그 시발점은 존재하지만 일단 발발하고 나면 양측 모두 작 중 주인공과 유디트처럼 미쳐가는 것이다. 한트케는 서방의 언론 보도가 한 축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점을 비판하며 밀로셰비치를 옹호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물론 한트케가 '위대한 유고'를 그리워해서라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이미 어린 나이에 희곡 뒤에 숨겨진 기호로서의 언어에 주목하고 『베를린 천사의 시』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함께 나아감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한트케가 그런 단순한 이유만으로 전범을 옹호했을까?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이별을 말하지만, 그 이별을 위해서는 양극이 존재해야 함을 절실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단지 가만히 있는데 발전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진실한 공존을 통해서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이다. 노벨상 선정 이후 그를 비토하는 많은 미디어와 네티즌들이 잘못되었다곤 말할 순 없다. 그렇지만 한트케의 말과 글을 심층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유디트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나는 무언가를 처음으로 경험하기 시작했으며 주변 세계라는 것이 더이상 악하지만은 않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 P69
당신들의 경우 엄밀한 의미에서 물건의 실제 소유자가 아닌 종업원들도 심지어 이렇게 말하곤 하죠. ‘그 물건은 /내게서/ 다 팔린 상태입니다!‘ 혹은 ‘/나는/ 카자흐스탄 스타일의 깃이 달린 셔츠도 있습니다!"라고요.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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