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2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뿔(웅진)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2월 12일부터 그후 보름간, <밀레니엄>시리즈를 읽었다. 쇳가루를 빨아들이는 자석처럼 몰입했다. 풍미의 스토가 내게 주었던 맛에 흠뻑 취했다, 황홀했다. 캐릭터는 강렬했고 내러티브는 풍부하고 화끈하고 박력 있었다. 그러나 내가 2,7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따귀 맞은 듯이 실감나게 목격한 건 세계 문학사에 새로운 형태로 등장한 영웅(HERO) 캐릭터였다. 그 영웅은 놀랍게도 신장 150센티미터의 여성이다.
그동안 영웅 캐릭터는 모두 남성이 차지했다. 여성은 낄 수가 없었다. 구조적으로 배제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가 남성이 지배하는 공간인 탓이다. 그 공간을 지배하는 이념은 가부장주의, 남근중심주의, 여성예속주의... 게다가 독서시장의 대주주인 여성들은 자신보다 잘난 여성 캐릭터를 못 봐주는 경향도 한몫 했을 것이다.
우리가 영웅이라고 부를 때, 그 낱말 속에는 존경심이 스며있다. 나도 저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최소한 배우고 따라하고 싶다는 마음을 포함한다. 과연 <밀레니임>의 주인공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평범한 독자에게 영웅으로 다가설 조건을 갖추었나? 키150센티미터, 정규학력은 초등학교 중퇴, 12살 이후 아동정신병원에 수감, 나이 안 따지고 여자 남자 안 가리고 맘에 드는 인간들과 렌덤으로 즐기는 섹스, 27살 때 까지 법원은 그녀를 금치산자로 선정, 법정후견인의 허락 없이는 제 통장의 돈도 인출하지 못함... 열거한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인간 스펙은 영웅의 이미지가 아니다.
하지만 <밀레니엄>시리즈를 읽어나갈수록,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사회부적응자가 아니라 투쟁하는 전사로 보였고 이윽고 나는 그를 여장부(Heroin)가 아니라 영웅(HERO)으로 보았다. 그리고 비록 그가 작품 속 캐릭터에 불과하지만 나는 그를 닮고 싶다는 마음이 일기시작했다. 정확히 무엇을? <밀레니엄> 3부 후반 법정 에피소드에서,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변호한 심리학자 이면서 변호사인 안니카 잔니니가 이렇게 웅변한다.
“난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존경합니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만일 내가 열세 살 때 쇠 침대에 가죽 끈으로 묶이게 됐다면, 난 완전히 무너져버렸을 겁니다. 하지만 겨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무기로 대항했지요.” -<밀레니엄> 3부 제2권 pp375~376
20대 시절에 내가 여자를 보는 가치의 준거는 무조건 예쁜 외모였다. 소위 쭉방에 스펙이 좋고 직업마저도 좋으면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런 여자와 사귀려고 안간힘을 쏟았고 사귀기도 했다. 그러나 삼십대를 통과하면서 사귀던 여자와 헤어지고, 떠나는 그녀 편에 십 수 년 간 줄기차게 피워대던 담배를 끊고, TV를 버리고, 술을 98%줄이면서 인생관(단지 여자를 보는 눈뿐만이 아니라 아예 사람 보는 준거틀까지)이 덤블링하듯 뒤집어졌다. 대관절 인간이란 게 뭐냐? 대답은 이랬다.
“인간 존재란 대단한 게 아니야, 그건 세포들과 피와 각종 화학 성분들을 잠시 한자리에 묶어놓은 피부 보따리에 불과해.” -<밀레니엄> 1부 제2권 p252
바닷물이 짜다는 걸 배우기 위해 오대양을 전부 들이마실 필요가 없다. 작은 스푼하나로 족하다. 하지만 사람을, 그 복잡한 기관이 얽히고설킨 인간을 스푼 하나로 판단할 수는 없다. 20대의 나였다면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완전히 맛이 간 년 정도로 봤을 것이다. 그녀가 노출한 행위만이 내 판단의 유일한 준거였을 테니까. 세월이 흘렀고 나는 이제 청춘이 아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단지 내 몸에 불필요한 지방을 쌓아가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와 더불어 반복적으로 유사한 경험을 축적하며 사태를 곰곰히 성찰하는 과정을 가리키도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이 단지 피부보따리만은 아니란 사실을 안다!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밀레니엄> 제 3부의 후반부에 펼쳐진 법정 에피소드는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과거가 오픈된다. 그리고 그녀가 유년시절부터 겪었던 고통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함께 노출한다. 그 긴 에피소드 시퀀스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면서 나는 세숫물에 얼굴 젖듯 내 가슴이 젖어갔다.
“내가 말했잖아. 이 이야기의 중심 주제는 어떤 스파이나 비밀 조직, 그런 것이 아니야. 이건 여성에게 자행되는 일상적인 폭력,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남자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밀레니엄> 3부 제2권 p394
<밀레니엄>시리즈는 궁극적으로 맹수같은 폭력를 회피하거나 그에 굴종하지 않고, 돌파하고 극복하는 용기있는 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우연찮게도 그 용기를 지닌 인간은 비오는 날 전선위에서 떨고 있는 새처럼, 약하고 자그마한 여자다. 그녀는 가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남성의 무자비한 폭력을 속에서도 살아간다. 아니, 살아낸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산다'이다. 체언(명사)와 용언(동사)이란 문법적 관계를 무시하면 인간과 산다 이 두 낱말은 동의어다. 인간은 사는 것으로 존재하고 그리하여 산다는 것은 인간의 유일한 목적이 된다. 그 목적을 완수하게 위해서 인간을 필연적으로 허무와 관계의 고통을 껴안는다. 인간의 본질은 단독자이기에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세계에 던져진 현존재로서 이 단독자는 가족은 물론 신 앞에서도 홀로 서 있다.
평온히 살아가기엔 너무나도 많은 위험이 잠복한 이 세계지만 <밀레니엄>의 히어로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그런 세상이라도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녀는 성난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세계의 폭력을 온몸으로 방어하며 돌파하고 마침내 극복하여 남성중심의 이 폭력적 공간에서 투쟁하는 단독자로 우뚝 서 있다. 강렬한 삶의 욕망과 그것을 지탱하는 용기와 인내를 무기로 남성 중심의 이 세상에 맞짱을 뜬 그녀였기에, 아니 그였기에 그러므로 나는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열렬히 응원하는 것이다.
스티그형, 왜 이리도 일찍 가버리신거예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