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유혹 - 상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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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설 연휴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을 읽었다. 소설 <최후의 유혹>과 에세이 <향연>이었다. <향연>을 읽으면서 다소 고통을 느꼈다.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이런 느낌은 카뮈의 초기작을 읽을 때도 그랬다. <결혼>, <행복한 죽음> <안과 겉>은 카뮈가 20대 초기에 쓴 에세이인데 나는 힘들게 읽었다. 문장은 추상적이고 그래서 내용을 이미지로 바꿔내지 못했다. 문장의 기의를 해독하지 못 한 체 기표만 읽어나가는 독서는 고통스럽다. 의미도 모르면서 암호문을 읽는 것과 같다

 그래도 나는 읽어 나갔다일단 첫장을 펼친 책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는다는 내 독서원칙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같은 문장을 몇 번 되짚어 읽는 현상도 생겼다. 마음 같아선 페이지를 북북 찢어서 내 던지고 싶었지만 마치 자해하는 것 같아 애써 참았다.

 

  <최후의 유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캐릭터로 내세운 소설이다. 스토리의 서사는 루카복음과 요한복음의 내용을 메인으로, 마르코복음과 마태오복음에 표현된 에피소드를 부분 발췌해서 작가의 상상력과 뒤섞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작품은 신약 4복음서를 짜깁기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김훈 씨가 쓴 <칼의 노래>을 읽었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충무공이 쓴 <난중일기>에 김훈 전유의 허무주의 색깔을 덧칠한 <난중일기> 리라이팅 소설 버전 같았다. <칼의 노래><난중일기>와 다른 점이라면 충무공을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에 빠진 마초로 그렸다 점뿐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최후의 유혹>에서 표현한 예수가 <칼의 노래>에 표현한 충무공과 같았다면, 즉 원전에 작가 취향의 디테일을 보강한 작품에 지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작품의 리뷰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최후의 유혹>도 처음에 의심했다. 소설 본문만 766페이지에 달하는 <최후의 유혹>에서 684페이지까지는 신약 4복음서를 현대적 랑그(langue)로 리라이팅한 것처럼 보였다나는 세상의 모든 형태의 스토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성경을 몇 번 읽었다. 대관절 이 세상에서 예수만큼 강력하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는가? 신약 4복음서는 신비로운 기적과 바리새인을 저주하는 예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스펠타클 드라마다. 예수가 일으킨 기적은 경이롭다. 인류의 대속으로 십자가에 못 박힐 자기 운명을 피하지 않은 용기에 경외심이 든다자신의 예언과 가르침과 믿고 따르지 않는 세상 모든 자들에게 가하는 예수의 위협은 놀랍기만하다. 그러므로 마땅히 작가라면  이런 캐릭터에 매력을 느낄 것이고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작품을 써보고 싶을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써냈다.

 

 그러나 신약 4복음서의 리라이팅 같았던 <최후의 유혹>은 작품 후반을 장식하는 마지막 82페이지에서 엄청난 문학성을 뿜어낸다. 아마도 이 82페이지가 없었다면 <최후의 유혹>은 신약 4복음서의 소설화된 부록에 머물렀을 것이고 카잔차키스는 무난히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것이다(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이 문제의 82페이지를 추가함으로써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정교회에서 파문을 당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은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최후의 유혹>을 금서로 지정했고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문학상 수상리스트에 오른 카잔차키스를 무시했다. 

 

 <최후의 유혹>의 후반 82장은 십자가에 박힌 예수가 마르코복음서 1534절의 내용(“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을 외치며 혼절한 이후부터 시작한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기절하자 수호천사가 다가와 예수를 깨운다. 천사는 십자가에 박힌 예수를 꽃이 만발한 풀밭으로 끌어내린다. 지상에 내려온 예수는 한때 자신이 무덤에서 살려낸 라자로의 두 자매(마리아와 마르타)와 결혼한다. 두 자매는 경쟁하듯이 예수의 아이를 낳는다. 예수는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을 보낸다. 마침내 노년에 이르고 예수의 목전에 죽음이 다가왔다. 그때 죽음을 앞에 둔 예수에게 엄청난 고뇌가 들이닥친다. (여기서 부터는 당신이 이 작품을 사서 그 내용을 확인하시길 바란다.)

 

 소설 <최후의 유혹>은 매우 지적인 소설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문장을 물 쓰듯 낭비하였고, 나보코보는 산문언어를 시어로 압축하여 독자는 쉽게 해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카잔차키스의 문장은 산문성을 유지하면서 깔끔하고 명료하게 서사의 내용을 분명한 이미지를 그려냈다. 사견이나 훌륭한 작가는 자신이 쓰는 지문과 대화를 독자가 이미지로 그려낼 수 있도록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문학가와 기타 저술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문학가는 자신의 표현하는 내용를 적확한 언어로 써야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수많은 낱말을 알아야한다. 카잔차키스가 <최후의 유혹>에서 표현한 지문과 대화는 작중인물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묘사했고 사건의 디테일을 명료하게 표현했다. 예를 들어 예수가 빌라도 총독 앞으로 압송된 이후의 에피소드 시퀀스(sequence)를 보자.

 

 4복음서의 기자(마태오/마르코/루카/요한)는 로마총독 빌라도를 중립적인 인물로 표현했거나 외려 예수에게 우호적인 인물로 그렸다. 4복음서에서 악인은 예수의 동족인 유대인(과 유대 3개 종파중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었다. 이민족이며 유대 지배자인 빌라도 총독이 체포된 예수의 무혐의를 주장해도 유대인은 막무가내로 예수를 죽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카잔차키스가 묘사한 총독 빌라도는 난로 옆에 누운 개처럼 나른하면서도 냉소적이고 영악한 인물이다. 카잔차키스는 지적인 수사가 풍부한 문장으로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를 써냈다. 아래 그 내용을 인용하면서 이 작품의 리뷰를 마친다.

 

당신 유대인들의 왕인 나자렛 예수인가?”  향수를 뿌린 손수건을 콧구멍에 대고 그는 놀리는 말투로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왕이 아니오.” 예수가 대답했다.

뭐라고? 당신은 메시아이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그토록 여러 세대에 걸쳐 그들을 해방시키러 와서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아 우리 로마인들을 몰아내리라고 기대하며 기다리고 기다려온 메시아가 맞지 않은가? 그런데 왜 당신은 자신이 왕이 아니라고 하는가?”

내 왕국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인가, 물 위인가, 아니면 공주에 떠다니나?” 웃음을 터트리며 빌라도가 물었다.

하늘에 있습니다.” 예수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좋아.” 빌라도가 말했다. “선물로 줄 테니까 하늘은 당신이 갖고, 지상의 왕국은 건드리지 말게!”

 

&

 

로마는 영원불멸이야.” 하품을 하며 빌라도가 대답했다.

로마는 선지자 다니엘이 환상 속에서 본 거대한 조상(조각품)이에요.”

조상이라니? 무슨 조상 말인가? 당신네 유대인들은 깨어 있을 때 갈망하던 대상을 꿈속에서나 본다니까. 당신들은 환상 속에서 살고. 환상 속에서 죽지.”

환상과 더불어,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투쟁은 시작하는 길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늘이 짙어지고 굳어져서 영혼은 육체를 입고 땅으로 내려옵니다. 선지자 다니엘은 환상을 보았고, 그 환상을 가졌기 때문에 바로 그것입니다. 영혼은 육체를 입고, 땅으로 내려와 로마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나자렛 예수여, 나는 당신의 교만함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겠는데, 혹시 교만함이란 백치성이 아닐까? 보아 하니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군. 아마도 그래서 그토록 제멋대로 얘기를 하는 모양이다. 난 당신이 마음에 들어.”

 

&

 

“... 나자렛 예수, 예수살렘의 공기는 당신 건강에 좋지 않아. 갈릴래아로 돌아가게! 나는 폭력을 쓰고 싶지 않아. 친구로서 얘기하는 거야. 갈릴래아로 돌아가!”

삶은 투쟁입니다.” 변함없이 단호하고 고요한 목소리로 예수가 대답했다. 

 

-카잔차키스 <최후의 유혹>, 열린책들. pp588~592 발췌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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