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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9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고등학교 시절에 요약본을 읽은 것을 제외하면 작년 정월에 이 작품을 처음 완독했다. 1,500페이지 분량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민음사/김혜경 번역)>이었다. 독후의 특별한 감(感)은 없었다. 뛰다가 때로 걸어서 순위와 무관하게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자의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가끔 이명이 들렸다. 원인은 알고 있었다. 분명히 읽었지만 이 작품을 전혀 읽지 않은 것 같은 (더러운)기분이었다. 사실 이 작품을 읽은 후 나는 줄거리를 요약하지 못했다. 매인 캐릭터 3인을 제외하면 작품 내에서 수시로 바뀌는 작중인물의 호칭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그루셴까, 아그라페나 알렉산드로브나 스베뜰로바, 그루샤, 그루쉬까, 아그리삐나. 이 다섯 개의 이름은 이 작품에서 한 여자를 지칭하는 표현인데, 작가는 작품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선택해서 쓰고 있다). 아마도 삶에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치기였는지도 모르겠다. 급기야 이 작품만큼은 완벽한 독서를 하고 싶다는 오기가 발동했고 시기는 ‘향후 10년간 매년 정월 안에 한 번씩 읽는다’ 하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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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평론가가 합창하듯 이 작품을 칭찬해도 예외는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보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이류 소설가로 낮잡아보았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 경험을 비춰보면 나보코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작가다. <롤리타>, <절망>, <사형장으로의 초대>에서 표현된 나보코보의 문장은 밤하늘의 은하수다.
우아하고 미려한 나보코보의 문체에 비교하면 도스토예프스키 문체는 망나니가 끼적거린 괴발개발에 불과했다. 세련하지 못한 그의 문장은 밤하늘에 마구잡이로 뿌려놓은 별빛 같았다. 주제와는 무관하게 감정적으로 흩어진 에피소드는 산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에우리피데스를 닮은 희곡적 단편과 엽편을 쓸어 담은 이삿짐 상자 같았다. 쓸 수 있는 것과 더 이상 필요 없는 것 그리고 약간의 쓰레기가 한 곳에 담긴 잡동사니 박스였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자주 분통을 터트렸다. 작가는 세계 3대 문호인데, 서술은 왜 이따위로 지저분하지? 대사에서 작중인물이 토로하는 감정을 좀 세련할 수는 없었나? 분량은 좀 줄였으면 좋겠는데.
그뿐이 아니었다. 독서하면서 나는 이 작품을 계속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수시로 흔들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한 세대 후배 작가인 안톤 체호프는 ‘마지막 장에서 총알이 발사되려면 첫 장에서 잠깐이라도 총이 보여야한다’고 말했다. 감히 위대한 작가의 작품에 딴죽을 걸 수 없다 해도 이 작품에 전반에 편제하는 작가의 개입은 작가 스스로 작품에 끼얹는 흙탕물로 보였다. 그것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사촌이었고 2천 년 전에 사망한 극작가의 불길한 오버랩으로 보였다. 그러니 스티븐 킹, 제임스 패터슨, 마이클 코넬리, 로버트 해리스 다카무라 카오루, 요코야마 히데오 같은 장르소설 작가의 선형적 스토리에 길든 내 눈으로 이 작품을 읽어나가는 건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작법상의 사소한(?) 스크레치는 <카라마조프 형제들>이 발하는 작품성에 흠결로 작용하지 않는다. 밤하늘 아래에 서서 고개를 들었을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검은 공간에 무작위로 뿌려진 우유빛깔 별이다. 밤하늘에 박힌 그 별은 길 위에 떨어진 돈처럼 개성이 없다. 그러나 우주의 심도(深度)와 종심(終深)을 들여다볼 혜안을 가졌다면 그 별빛이 다만 암석이나 가스뭉치가 아니라 다양한 모양의 계(系)를 이룬 우주의 구성 형태임을 알게 된다.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 종이상자에 마구잡이로 쓸어 담았을 거라고 믿었던 단편과 엽편은 모두 작가가 설정한 주제 아래로 모여든 스토리 핵심 시퀀스(Sequence)이거나 에피소드(Episode)로 드러났다. 제재와 캐릭터별로 작가가 임의로 분류한 써나간 이야기는 그것 자체로 뛰어난 단편소설이면서 부시(俯視)할 때 그것은 작가가 이 작품에서 표현한 주제 아래로 모인 계(系)의 일부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숲의 변두리와 종심을 구별하지 못할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사물자체 뿐이다. 이 숲과 저 숲을 구별하는 이데아(plato!)를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아마존 밀림과 부와 드 볼로뉴(Bois de Boulogne)는 같은 공간이 아니다. 작년이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밀림에서 아름드리나무만 구경하다 운 좋게 숲 반대편으로 나왔을 뿐이었다. 그때 나는 유사한 모양의 지형에서 비슷한 크기의 나무만 보았을 뿐 그 숲만이 지닌 독특한 자연감(自然感)을 느끼지 못했다. 금년, 생애 두 번째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위대한(더불어 방대한) 이 작품이 뿜어내는 우주적 아우라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고 경외감에 나는 가슴이 벅찼다.
어느 선승이 안거를 마친 후 도반에게 ‘이 뭐꼬? 개에게도 불성이 있나?’하고 물었더니, 도반승려는 아무 말 없이 선승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고, 질문한 선승이 웃었다고 한다. 불교에서 선승은 자신이 깨친 화두를 문자와 말로 표현하지 않고 때로 기괴한 느낌을 주는 포퍼먼스로 답하기도 한다.
지금 당신이 내가 쓴 이 허섭한 감상문을 읽을 때 당신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카라마조프 형제들>)이 아니라 내가 탐험하면서 남긴 희미한 족적이다. 별다른 것 없는 느낌의 빠롤(parole)에서 들려오는 그럴 것 같은 느낌의 시니피앙(기표)일 뿐이다. 타인의 체험을 말로 듣고 자신의 경험으로 오해하는 건 어리석다. 그 소리는 당신의 지식도 경험도 되지 못할 앎의 불완전한 파편일 뿐이다. 결국 선승이 공안의 깨침을 불립문자(!)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이런 게 아닐까. 그러니 당신은 내가 쓴 이 따위 허섭한 감상문은 이제부터 잊고 이 작품을 읽어라. 그러면 당신도 나처럼 문신(文神)을 체험하리라.
이 작품을 완독한 자로서 나는 말한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아들은 이 작품을 읽어라. 그리고 누군가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아버지가 될 세상의 남자들이라면 반드시 이 작품을 읽어라.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하다!)당신이 직장인이라면 이 책을 사서 읽기 바란다. 도서관에서 대여해 읽는 행위는 반칙이다. 도서관은 용돈 부족한 학생과 60세 이상 노인들과 TV드라마에 지겨워하는 40대 이후 주부들에게 양보하자!
사족
가독을 방해하는 작가의 독특한 서술
프롤로그(‘작가로부터’)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까라마조프 형제들>은 총 4부 12권(chapter)으로 구성되어 있다. 메인캐릭터는 5명이고 서브캐릭터가 25명이다. 각 챕터는 메인 캐릭터와 (작가가 설정한)특정 테마를 중심으로 3개에서 14개의 시퀀스(Sequence) 또는 에피소드(Episode)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소설의 형태를 띠지만 일부 지문과 대화는 연극적 흔적이 강하게 베여있다. 특히 각개의 캐릭터가 표현한 대사는 감정을 지나치게 과장했다. 작품의 지문에는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에 등장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작가가 등장하여 상황을 정리하거나 설명하는 대목도 등장한다. 방대한 분량과 이런 서술상의 독특한 요소는 독자의 가독과 몰입을 방해할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작품의 흠결로 보기 힘들다. 이 작품은 1880년에 마침표를 찍었는데, 러시아에서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에 국내소설은 언문일치의 신소설조차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