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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
조나탕 베르베르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월
평점 :
『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
조나탕 베르베르 ㅣ 열린책들
호기심의 시작은 '또다른 베르베르' 라는 소개 문구였다. 프랑스 작가인데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아닌 '또다른 베르베르'의 등장이라는 출판사의 소개는 신박했다. 게다가 이 책은 술술 잘 읽힌다. 재미도 있다. 다만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부담스러웠다. 각설하고 앞으로 눈여겨봐야할 신인이라는 프랑스 대중의 찬사는 인정한다.
젊은 여성 마술사의 모험으로 시작하는 작품은 심령술, 탐정, 음모, 자아찾기를 거쳐 종국에는 개인의 행복이 가장 중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19세기에 실제로 존재했던 심령술사 폭스 자매와 현재도 존재하는 핑거턴사를 소재로 다룬 만큼 이야기의 현실감이 느껴진다.
1888년, 뉴욕, 스물여섯 살의 가난한 마술사 제니는 시장 바닥에서 동네 아이들을 상대로 공연을 펼친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명 탐정 회사인 '핑거턴' 사의 수장 로버트 핑거턴이 제니를 찾아와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한다. 그녀의 임무는 뉴욕을 장악한 심령술사 폭스 자매의 심령주의 교단이 대중을 속이는 속임수임을 밝혀내는 것이다. 신분을 속인 채 영매인 두 자매와 가까워진 제니는 이들 자매의 비밀에 접근하고, 그들이 심령술의 영매가 아닌 개인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길 바란다는 걸 알게 된다.
작가가 왜 심령술과 마술을 다루고, 몸을 파는 여인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했을지 생각해 본다. 작품에서도 표현되었듯 19세기의 여성들은 제약이 많았으며 남성들의 부속품처럼 취급받던 시기였다. 혼자만의 독립을 위해선 필요한 것이 많지만 제대로 된 일자리를 마련하기도 힘든 때였다. 결국엔 타인을 완벽하게 속이거나 내가 가진 나의 몸을 팔아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방식이 그들의 생존 수단이 된다. 이들의 생존수단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대척점에 있는 인물들이 핑거턴 사의 두 형제라는 부분도 생각해 볼 지점이다. 폭스 자매의 심령의식이 무조건 사기라고 단정하며 수사하고, 제니를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 핑거컨 사의 두 형제 중 한 명의 노골적인 무시가 의도적으로 작가가 여성의 독립과 인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함을 보여준다. 그 방식이 쉽고 간결해서 좋다.
결국엔 마술도 심령의식도 그 속에서 무언가 얻기를 바라는 관객과 고객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속여지기를 바라는 대상이 열광하고 집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마술이 뻔한 눈속임인 줄 알며서도 즐긴다. 심령의식도 항상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그 안에서 위안을 얻는다. 결국엔 알면서 속는 것일 수도 있다. 나를 속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안에서 얻어지는 나의 안식과 위로와 흥겨움이면 충분한 것이다.
심령주의 집단에서 독립하여 개인의 행복을 찾은 심령술의 영매 마거릿. 그녀는 죽은 이들은 존재하지만 망자에게 엮매여서 삶을 불행하게 사는 것은 심령들도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불행이라고 말한다. 그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들을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되 미련을 갖지 않는 것이다. 미련은 우리를 두고 떠난 그들에게도, 지금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도 불행이다.
독특한 소재와 톡톡 튀는 문장이 읽는 재미가 있었던 길고 긴 작품이었다. 작가의 다음 작품은 좀더 분량이 적길 바라며 다음 작품도 기다려보고 싶다.
▶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