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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46
케이트 쇼팽 지음, 한애경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1월
평점 :
『각성』
케이트 쇼팽 ㅣ 한애경-옮김 ㅣ 열린책들
소크라테스는 '배부른 돼지' 보다는 '배고픈 철학자'로 살겠다고 했다. 이 주제는 '깨우침'을 이야기할 때 매번 회자된다. 19세기의 작가 케이트 쇼팽의 『각성』을 읽으면서도 생각해 본다. 눈을 부릅뜨고 깨우친다는 것은 왜 필요한 것일까?
에드나 퐁텔리에가 그랜드 아일에서 보냈던 여름은 기존의 다른 여름들과는 달랐다. 혼자의 힘으로 바다 멀리까지 수영을 나간 그녀는 온전히 혼자만으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음을 '각성'하고 달라진다. 또한 휴양지의 모든 여인들에게 말동무 상대였던 젊은 청년 '로베르' 로 인해 새로운 사랑의 감정도 경험한다. 여름을 보내고 돌아온 뉴올리언즈에서 에드나는 아이들을 돌보고, 사업가 남편의 사업에 도움이 될 교제들 보다는 자신의 사색과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게 된다. 그녀의 '각성'은 그녀를 의지하며, 기다리는 여인이 아닌 자립하며 행동하는 여인으로 변화시킨다.
변화와 자아찾기가 모두에게 환영받지는 못한다는 걸 새삼 다시 깨닫는다. 특히나 가정을 가진 여성에게는 더하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칭찬한다. 하지만 19세기 뉴올리언즈에 살면서 사업가 남편과 두 명의 어린 아들을 가졌던 에드나 몽텔리에의 자주 능력을 위한 변화는 '이상함'으로 치부되며 의사와의 상담 이유가 된다.
화요일은 퐁텔리에 부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날이었기에 , 화요일 오후만 되면 손님들이 그들의 저택으로 쉴 새 없이 몰려왔다. 이것은 퐁텔리에 부인이 남편과 결혼한 뒤, 언제나 어김없이 진행했던 주중 행사였다. 그녀의 주도였고, 퐁텔리에 씨의 사업에도 꼭 필요한 손님들이었기에 중요한 행사였다. 그러니 그랜드 아일에서 돌아와 몇 주 지난 화요일 저녁에 퐁텔리에 씨는 자신의 부인이 '화요일'에 손님들을 맞이하지 않고 외출했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나가고 싶어서 진행한 외출이었다는 아내의 말에 그는 더 놀란다.
화요일의 이유 없는 외출 이후 에드나는 서재에 새로 들여놓을 가구를 구경가자는 남편의 제안을 거절하고, 한동안 손을 놓았던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다. 이에 퐁텔리에 씨는 아내가 낯설고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당당하다. 그녀의 당당함은 여태 자신을 포장하던 거짓 자아를 벗어던지고 자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자아찾기는 그녀를 반짝반짝 빛나게 한다. 누군가의 아내일 때와 누군가의 어머니일 때의 아름다움이 아닌 그녀 자신일 때의 아름다움에 그녀의 반짝임은 더욱 빛을 발한다.
하지만 에드나가 자신의 개인 소장품 중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이라 여기던 퐁텔리에 씨에게 그녀의 변화와 거절들은 자신에게 대항하고, 어머니로써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에드나가 '가족'을 위해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참아내고, 자신의 모습이 아닌 거짓 모습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옳은 것일까? '가족'이라는 집단을 위해 '아내'라는 소수가 자신을 지워버린 채 살아가는 것은 폭력일 수도 있다. 그것이 폭력인 줄도 모른 채 살아갔던 그녀는 어느 순간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그것이 어쩌면 자신의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무지해서 생긴 상황이라는 것을 '각성'한 것이다.
혹자는 에드나의 모든 선택이 너무 극단적이고, 스스로를 궁지에 모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상황이라고 느꼈거나, 너무 큰 '각성'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의 모습이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 작품이 그녀의 이전 상황을 서술하지는 않아 그녀의 변화가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으나 하루라도 온전히 자신으로 행복하게 살 길 원했던 여자의 선택이라 생각한다며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도 있다.
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시간에 로베르와 재회하게된 에드나.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외마디소리를 지른 그녀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어쩌면 그의 멕시코 행은 젊은이의 원대한 포부가 아니라 에드나의 감정을 깨닫고 도망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젊은이 였을까? 찌질한 겁쟁이였을까?
에드나는 로베르와 재회한 후 그와 함께 있었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손도 만졌다. 하지만 그가 멀리 멕시코에 있었을 때가 오히려 더 가까웠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을 깨운 '로베르'라는 인물이 자신이 만든 허상이었음을 깨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베르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혹여 사랑한다 하더라도 사회와 관습을 깨고 에드나와의 사랑을 완성하려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예전같은 그의 부드러움을 다시 일깨워 준 것도 그녀이고, 그들의 부드럽고 시원하며 섬세한 키스를 먼저 시작한 것도 그녀이다. 그런데도 결국은 또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비겁함을 보이며 로베르는 떠난다.
로베르와 함께였다 한들 그녀가 과연 만족감을 느끼며 행복했을지는 알 수 없다. 아이들이 소중하지만 그녀의 몸과 영혼을 소유하는 것은 절대 허용하지 않았으며, 오만한 라이즈 양과는 다르게 예술가임을 자부하면서도 사람들과 즐길 줄 알았던 그녀를 쇼팽의 표현대로 로베르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을 온전히 그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의 사랑은 의미가 없음을 다시 한 번 그녀는 '각성' 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바꾸고, 사회의 눈총과 비난을 받으며 얻은 사랑이 결국은 이전과 같은 희생과 속박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케이트 쇼팽의 『각성』 은 당시에는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작가 본인은 물론 작품도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세기를 거쳐 지금은 '페미니즘'의 선두에 서는 작품으로 인정 받고 있다. 에느나의 깨우침과 자기 찾기,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깨닫는 사회의 벽으로 인한 좌절이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알기에 답답하다. 하지만 이 작품처럼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각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 영부인에게 선물받은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