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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양장) ㅣ 앤의서재 여성작가 클래식 3
메리 셸리 지음, 김나연 옮김 / 앤의서재 / 2022년 3월
평점 :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ㅣ 앤의서재
얼마 전 독특한 단편을 읽었다. 강화길 작가의 [복도]였다. 기괴하고 섬뜩하며 독특한 작품이었다. 작가의 또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앤의서재 [프랑켄슈타인]에 남겨진 강화길 작가의 '추천의 글' 을 마주하게 되었다. 작품과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강화길 작가가 어린 시절 이 작품을 읽었을 때는 괴물이 무서웠다고 한다. 하지만 더는 어리지 않았을 때 괴물을 다시 생각하니 그가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버려지고 외면받는 것에 대해 느꼈을 비참함에 공감하게 되었다고 한다.나또한 그랬다.
여러 번 재독했던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읽는다. 엄마가 되고 나서 읽었을 때가 가장 인상 깊었다. 괴물의 괴로움, 외로움, 분노가 버려진 아이의 그것처럼 느껴져서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이번엔 어떤 부분에서 어떤 감정이 야기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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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장의 편지로 시작한다. 영국에서 북극의 오지로 탐험을 나선 월턴이 영국에 살고 있는 누이 사빌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들이다. 어린 시절 꿈이었던 모험의 길을 사촌의 유산으로 이룰 수 있게 된 월턴은 모든 것이 만족스러우나 자신의 곁에서 자신을 충고해 줄 친구의 부재를 안타까워 한다. 그가 특히나 친구를 원하는 이유는 독학으로 지식을 쌓았기에 자신이 여러 면에서 부족하다고 느끼며, 자신의 부족함을 채울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학식이 풍부하며 기품이 있고, 고귀함 까지 갖춘 인물이 월턴 앞에 나타난다. 빙판에서 누군가를 맹렬하게 광기를 품고 쫓고 있던 사람. 그는 월턴이 추구하고자 하는 지식과 지혜가 때론 뱀이 되어 스스로를 해칠 수 있음을 경고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프랑켄슈타인』 은 1818년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출간 당시 제목은 『프랑켄슈타인:근대의 프로메테우스』 였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준다. 제우스는 이 일에 분노하여 복수를 결심하고, 판도라 라는 여성을 보내 인간들을 재앙에 빠지게 한다. 메리 셀리가 왜 이 작품에 '근대의 프로메테우스' 라는 부재를 붙였을지 생각해 본다. 지식만 가지고 오만하게 행동한 프랑케슈타인의 모습을 프로메테우스와 연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자신의 행동이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만한 모습이 프랑케슈타인과 프로메테우스의 겹쳐지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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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자부하는 프랑켄슈타인은 강요받는 공부는 목표를 가지고 스스로 매진하는 공부에 비해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지 못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스스로 매진하는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며, 그건 자신을 지지하는 부모와 가족, 그리고 자신의 친구 앙리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프랑케슈타인의 자기주도적 학습은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홀로 하는 공부로 인해 이미 지난 학문인 코르넬리우스 아그립파에 빠지며, 주변의 충고도 무시하게 된다. 결국 아그립파는 프랑케슈타인에게 생명도 연금술처럼 조작하고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품게 한다. 과학의 이론은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오면 언제나 바뀔 수 있다. 이는 과학이라는 학문이 고정적이지 않고, 유연한 학문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소통하고 토론하며 공부해야 하는 학문이기도 하다. 결국 혼자 책만 보며 진행했던 공부가 프랑케슈타인에게 신의 영역을 침범할 수 있다는 허황된 생각을 품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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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을 만든 창조자가 , 괴물을 잘 알지도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 , 학식과 교양을 가진 펠릭스 가족이 괴물을 끔찍해 한다. 본인만 빼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끔찍해 하고, 마주하며 경악한다면 어느 누가 세상을 저주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그들에게 특별히 해를 입히거나 악행을 저지른 것이 아닌데도 저주의 말을 듣는다면 말이다. 그의 말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혼란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끔찍해 하는 이유는 단지 커다란 몸과 흉측한 외모 때문이다. 그의 흉측한 외모 안에 음악에 매혹 당하고, 다정함에 감동 받고, 타인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려는 배려와 깊은 사유와 지식이 존재함을 아무도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인간 모두를 경멸하며 자신과 같은 외모의 이성을 만들어, 함께 세상과 단절하고 살아보겠다는 그의 바람이 이해된다.
괴물에게 반려자를 만들어주는 것은 프랑켄슈타인의 말처럼 악을 키우는 일이고, 그들은 서로를 증오하고 경악하게 될까? 흉측한 외모를 가진 이는 악해질 수 밖에 없다는 근거 없는 편견이 아닐까? 왜 괴물의 그녀가 자신의 외모를 추하게 여기고 세상을 원망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괴물은 그녀가 만들어지면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외부와 단절되어 살겠다고 약속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기준으로 삼을 다수가 없는데 괴물의 그녀가 자신의 외모를 추하게 여길지도 의문이다. 외부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그 사람의 내면을 반영하지 않음을 우린 안다. 괴물과 괴물의 그녀를 대할 때도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프랑켄슈타인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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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웰턴이 괴물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궁금해 하자 무분별한 호기심이 가져올 결과를 경고한다. 결국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의 입을 통해 말하고 하는 것이 무얼지 생각해 본다. 오만함에 대한 경고일까? 소통되지 않은 지식에 대한 우려일까? 읽으면 읽을수록 살인을 저지렀던 괴물보다는 변덕스럽고 무책임한 프랑켄슈타인에게 눈쌀이 찌푸려진다.
그럴만하다고 범죄에 타당성을 부여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괴물의 분노에 공감하게 된다. 한 인간의 오만함과 무책임함이 빚어낸 비극이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 보다는 괴물이 비극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