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모자를 쓴 여자 새소설 9
권정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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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하다. 어디까지가 망상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모호하다. 그녀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모호하다. 그녀가 검은 모자를 쓴 여자인지, 304호 여자인지 모호하다. 그가 그녀의 남편인지, 그녀가 갖고 싶은 남자인지 모호하다. 모호함이 섬찟함을 불러온다.

민은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는다. 자식을 잃은 슬픔은 그녀를 매몰시킨다. 봄에 잃은 아이에 대한 아픔을 겨우 추스리고 맞이한 겨울의 눈 내리는 날, 버려진 아이 동우와 검은 고양이를 만나고 영겹결에 가족이 된다. 민은 동우와 검은 고양이 까망이가 자신의 삶에 들어온 것이 남편과 누군가의 계획이며 그들이 계획을 위해 자신의 아이까지 희생시켰다 생각한다. 그녀의 상황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상황이 실제인지 망상인지 깨닫지 못하며 그녀는 검은 모자를 쓰고 304호를 응시하고 있다.

막장 드라마의 스토리 같은 우연의 연속이 나열되며 작품에 대해 '기대 이하' 라는 평가를 매기려 할 때 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망상이라면 말도 안 되는 사건의 연속이 충분히 서술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결코 우연이나 자신의 작은 실수 때문이 아니라 나를 둘러 싼 음모라고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충분히 생길 수 있는 다양한 불협화음들이다. 모호한 것들을 꿰어 맞추다 보면 미혹과 억측이 생겨나고(p.8) 미혹과 억측은 망상과 함께 어느 새 살이 붙어 실제가 된다. 하지만 나는 실제라고 확신하는 것들을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아니라고 하니 그녀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을 둘러싼 음모라고 단정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민이 편집증적인 망상을 가진 여자라면 문장들을 통해 병적 망상을 가진 사람들이 주변을 어떤 식으로 인지하고 단정 짓는지 어느 정도는 대리 경험할 수 있었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은 온전한 한 사람을 지탱할 수 없게 한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을 잊으려하고 지우려하다 보면 망상이 만들어진다고 민을 상담한 의사는 말한다. 현실을 인정하며 눈을 뜨고 제대로 바라보아야만 제 꼬리를 물고 빙빙 도는 우로보로스가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작품 속 의사는 민에게 충고한다.(p.198)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모두 한 몸처럼 연결되어있다. 과거를 직시하지 않는다면 연결된 시간의 한 축인 현재에 대해 설명이 어려워지면서 모든 상황이 이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한 인간은 혼란에 빠지며 망상을 불러온다. 아픈 것도 받아들이고 이겨나가야 진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앞으로 나가기를 잠깐 보류하고 충분히 아픔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무뎌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덮어버리는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숨어 있는 것이다. 작은 미풍에도 펄럭이며 슬쩍슬쩍 벗겨지면 그곳에 그것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화들짝 놀라 당황할 수도 있다.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이겨내야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슬픔과 아픔은 덮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아픔을 직시하지 못하고, 이겨내지 못해 추운 밤 까만 모자를 쓰고 행복한 누군가의 창을 바라보며 어둠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송장나비가 날개를 펼치기 위해 변태를 준비하듯, 민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p.252) 그녀가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 나비가 되길 바래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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