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안을 담은 캐리어.
캐리어라는 세음절을 두 음절로 줄이면 우리에게 그것은 ‘설렘’이라던가 ‘흥분’이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작중화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설렘과 흥분이라는 거울 뒷면에 떠오른 단어인 ‘불안’이 된다.
이 소설 제목에 본능적으로 마음이 끌렸던 것은 이 제목이, 삶의 음과 양을 한번에 아우르고 있다는 그 어떤 ‘완전체적인’ 면모 때문이었을 거다. 가령 제목이 ‘신나는 캐리어’였다면 그 매혹이 덜했을 것이다. 모호하고 알 수 없는 것 자체가 삶의 매혹이자 어려움이자 역동인 법이니까.
음과 양이라고 말했듯이, 제목 안에 이미 이 이야기의 얼개가 내장되어 있다.
캐리어가 ‘삶 속의 이동’ 혹은 ‘삶이라는 이동’그 자체에 대한 은유이듯. 이 책 전체는 희정의 삶의 쿠루셜한 순간들의 변곡점과 이동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 이동은 시공간에 걸쳐 이루어진다. 시간적으로는 관계성과 연관된다. 희정의 청소년기에서 청년기로, 가족 단위에서 하나의 자아로의 떨어져나감, 그로부터 다시 반려자과 그 너머의 새로운 가족으로의 이행이라는 관계 변화성을 그려나간다.

공간적으로도 몇 개의 이동이 보인다. 아동기로부터 잉태된 불안이 파열된 청소년기의 공간에서 그림이라는 자화상과 마주하는 대학 시절의 공간, 마드리드라는 낯선 도시와의 조우를 통과한 뒤 한 번 거쳐가는 간이역같은 장례식장. 죽음이 새로운 시작점이 되듯이 희정은 여기서 과거와 한 번 맞닥뜨린 다음 반려자와의 공간 및 그 반려자가 세속적 구속의 관계처럼 보이는 결혼을 하자마자 오히려 팔을 벌려 놓아주는 더 열린 우주 같은 런던으로 향한다. 우리나라와 외국이라는 상징성 속에서 외국 속의 한인민박이라는 공간도 독특하다. 그곳의 주인과 스탭들과 이상한 이웃 및 숙박시설 이용자들 또한 캐리어의 임시성 만큼이나 임시성을 띤 채 정연하지 않은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임시성은 희정이 부여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여 마주한 것이기에 자기를 수시로 바라보는 손거울 같은 시공간으로 자리매김이 됨직하다.

어쩌면 희정에게 캐리어의 상징은 여행의 해방감 같은 것이 아니라, 존재가 귀속할 집에 착륙하기 전의 임시적 단위로서의 집이었을지도 모른다. 불안정한 과거와 흔들리는 미래 속에서 늘 아연한 현재의 그녀에게 집 혹은 가족이라는 안락함의 상징은 파괴된 지 오래다. 그것은 아빠가 어느 날 캐리어를 끌고 나감으로써 확실히 해체되었고, 늘 자기 생각만 하며 딸을 도구처럼 여기는 엄마를 존재의 고향처럼 생각할 수도 없는 지경이다.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긴 친구는 세상을 떴고, 그나마 친구랍시고 하나 있는 애도 희정을 전혀 담아주지 못한다. 있답시고 보탬이 되지 못하고 내 등을 떠미는 존재들. 이 속에서 희정에게 더 넓은 세계를 살고 오라 떠미는 연인 연석의 손은 오히려 통합적 삶으로의 초대장처럼 기능한다. 참새는 비둘기로 탈피할 수 있을 것인가?

일년 전에 읽고서 몹시 맘에 드는 작품이었지만 느낌을 정리하는 사이 시간이 흘러가 버렸고 그러다 최근 다시 한번 더 읽었다.
처음 발표하는 소설이라지만, 그 설정과 전개가 너무도 매끄럽고 자연스럽고 인상적이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또 자기 자신의 소설을 쓰고 싶은 의욕마저 일으키는 작품이었다. 나도 약간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해볼까 하는. 누군가 그림을 재미있고 그럴싸하게 그리는 걸 보면 나도 그리고 싶어지고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듯이.
모먼트들은 시각적이고 입체적이며, 인물 및 배경의 설정은 간결하며 상징적이다.
기본적으로 삶의 모습을 조금도 미화하지 않는 극사실주의다. 특히 이 작품 가족의 모습은 사회가 가족주의를 강조할 때나 혹은 드라마 속에서 흔히 그러하듯 쉬 미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가족들의 맨얼굴을 더욱 드러내준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분칠된, 각자의 이기성에 기반하여 관계맺음되는. 이 작품 속 자기 할 말만 딸랑 하고 전화를 끊는 엄마의 모습 같은 것은 왜 이리도 익숙한가!
한편 희정이 거쳐가는 무대 데코에는 이상한 낭만이 흐른다. 책 속에 나오는 장면처럼 먹에다 와인을 따라 갈아내 그린 그림 같은 작품이다.
표지와 내지의 드로잉, 활자체 등 미적인 측면이 내용하고 아주 잘 어우러진 완전체이다. 곁들여진 소묘와 수채화로부터 감정의 독백이 기이한 농담으로 번져나는 느낌을 받았다. 미술을 하는 분들은 재료를 익숙하게 다루듯 글을 쓴다는 나만의(?) 환상과 부러움이 일렁였다.
이 작품을 읽은 감상을 절반도 못 이야기했다. 이 책은 불안과 친밀한 내 속의 불안과 친구 같은 책이었다. 전작 에세이 <까미노 여행 스케치>는 그림이 주라서 길지 않은 글을 통해 이를테면 고난과 통증을 유머로 치환시키는 저자의 뉘앙스 같은 것을 엿보았는데, 본격적으로 텍스트 위주인 이 작품에 이르러선 작가가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역량이 아주 적절하고 능란하게 펼쳐짐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쩌면 이다지도 적절한 비유와 감각과 상황 설정과 독백과 대화의 배치인가 싶었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영악하게 자신이 예뻐보이는 각도로 단번에 찍는 셀피가 아니라, 거울을 보며 자신의 음영을 찬찬히 더듬어 대화해가며 그린 청춘의 자화상이어 보인다.
이 책이 방황하는 청춘을 건너지르는 이들에게 더 읽히면 좋겠다. 아마 이 작품 속 희정에게 꽤 감정이입이 일어날 것이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캐리어 속에서 자신만의 손거울을 집어들게 될 것이다. 캐리어를 꽉꽉 채우고도 남는 이 채워지지 않는 공간은 대체 무엇인지 반문하게 될 것이다.
발췌:
‘왜?’가 어딨어. 왜를 왜 생각하지 않는 걸까. 이 모든 질문들은 스스로를 위한 가장 좋은 척도이자 사령관이 될 텐데, 대다수는 잘 모르는 남을 사령관으로 모신다. p.46
사랑은 관찰이라고 했다. 그리고 관찰을 시작으로 관계가 형성되는 거라고 그는 말했다. p.52
복숭아 살에 와인 색이 물드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아는가? 어떤 단단한 과육도 알코올 앞에선 무장 해제되는 게 사람이랑 같았다. (...), 나는 문득 와인을 손바닥만한 벼루에 붓고 먹을 갈고 싶어졌다. p.68
가열한 태양을 가려주는 얇고 긴 잎사귀가 가시 같은 나무들은 이글거리는 스페인 태양 아래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펴지 않는 듯하지만 지나가는 모든 이의 그늘이 되어주는 스페인의 가로수가 내게는 따스한 그늘이 되어줬다.(...) 지금 느끼는 이 평화는 사실 밖에서 오는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길거리 화가가 그렸던 무채색엔 평화가 없었고, 뾰족한 잎사귀의 가로수 그늘에도 따스함보다는 서늘함이 묻어 있었는데, 내 마음엔 출처 모를 따스함이 피어나고 있었다.
지는 태양이 만들어준 내 그림자가 물 위로 자기를 옮기는 동안 나는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