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붓으로 전하는 위로
서정욱 지음 / 온더페이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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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큰 불행을 겪는 이에게는 보통, 뭐라 드릴 말을 못 찾겠어요 라는 말이 그나마 할 말이다. 감정이입을 실시해본답시고 짐작 가능한, 그 밖에 있는 것이 고통 자체의 형형한 얼굴이다 보니.

 

그러니까 바로 그런 인물인 프리다 칼로를 다룬 책에 대한 리뷰 또한, 그 할 말을 못 찾겠다는 말로 시작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앞부분을 읽으면서 프리다 칼로의 삶의 축을 이루었던 고통을 하나하나 떠올려 상상하면서...그러나 그 상상은 스스로 오래 갈 수 없음을 안다는 듯이 어느 순간 놓아져 버렸다. 어불성설인 거다.

 

그냥 일단 다 읽고서 무엇이 떠오르는지 봐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엔 그런 생각이 든다.

 

영혼의 삶을 이야기하는 책들에선 그렇게 이야기된다. 영혼은 인간 육신의 옷을 입고 세상에 오기 전에 자기가 살 삶의 세팅 값을 미리 정해놓고서 온다는 것이다. 그 기준은 자기 영혼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드라마 요소들의 선택인 셈이다. 영혼의 학습 차원에선 꼭 세상에서 좋은 게 좋은 게 아니어서 도전적인 영혼들일수록 고난의 환경을 택하기도 한다. 그렇게 설정한 삶을 잘 살아내고 나면 가산점이 붙어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혼의 차원에선,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 이런 일까지 당해야 하나? 같은 말이 쓸모없는 물음이요 푸념이 될 뿐.

 

프리다 칼로의 삶을 일별하고 나니 위의 이야기가 더욱 진해진다. 극도의 고행을 통해 그녀의 영혼이 도달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애초의 의지가 있었을 거라는. 아마도 그녀는 그 지난한 삶을 마친 뒤 그토록 날고 싶어하던 하늘로 돌아가 그동안 지상에서의 깨달음을 바구니에 하나하나 수납하며 미소지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조금도 아프지 않은 몸으로, 영혼 본연의 모습으로.

 

그녀는 자주 자신을 아즈텍의 제의에 바쳐지는 제물 혹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와 동일시했다. 제물로서의 삶을 실패하고 덧없고 허망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녀가 사랑하는 우주와 생명 전체에 바치는 희생이라 친다면, 그게 양분이 되어 모두의 풍요에 기여할 수 있다면. 개체로서의 자아가 모든 걸 갖추고 누려야만 행복한 삶이라는 지극히 속세적인 삶의 설정이야말로 오히려, 그만그만한 삶을 연명해가고자 하는 뭇 사람들의 이기적 한계 속에 갇힌 것일 수 있다. 프리다 칼로는 피할 수 없는 자신의 고통의 감옥에 유폐되어 평생을 지내야 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하여 역설적이게도 그녀에겐 이미 포기된 이기적 삶의 설정을 벗어나고 뛰어넘을 수밖에 없었노라고, 나는 풀이하게 된다. 무엇을 통하여? 그녀의 지팡이이자 스승이었고 가장 가까운 벗이었던 예술을 빌어서. 가시처럼 파고들어 언제나 피와 눈물을 뚝뚝 흘리게 만들었던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자양으로 오로지 예술만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 예술가로부터 생명력이란 꼭 육체적 건강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작은 전제를 얻는다.

 






애초에 안락한 삶의 테두리와는 인연이 없는 영혼들이 있다. 숭고하고 확장적인 영혼들에게 안락이야말로 죽음과도 같을 것이다. 나는 이 강렬한 생명력 그 자체인 프리다 칼로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삶에서 안락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진 조건들을 코웃음을 흘리며 미리 하나하나 다 삭제했을 거라 추측하지 않을 수 없다. 영혼의 역사에서 한 번쯤은 철저한 고통을 어떻게 다른 것으로 바꾸는지를 실현해야만 하는 그녀만의 필연이 있었을 것이다.

 

고통을 벗어날 수 없는 조건일 때에는 그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만이 유일한 통로가 된다. 칼로는 가장 직설적인 상념들을 그림으로 고스란히 그려낸다. 이국적인 색채와 환상성으로 인해 얼핏 폴 고갱과 살바드로 달리가 합쳐진 것처럼도 보이는 그녀의 그림은 영혼의 여정으로 향하는 미의 궤적이다. 도저히 위장하거나 미화할 형편이 아닌 삶을 정면에서 바라본 독백의 형태로 이어지는.

 




 

너몹시도 귀한 책이다. 그녀의 정말 많은 그림들을 세밀한 부분컷까지 모두 살려 아주 친절하고 세세하고 쉽게 풀어내 들려주는, 눈으로 읽는 도슨트였다.

 

 

너무나도 적절한 관점이 속속들이 드러난 본문들에서 몇 군데를 가져와 나의 개인적 풀이를 덧붙여 본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창문에 입김을 불고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던 중, 이상한 체험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많이 웃어주었고 즐거워했으며, 목소리만 듣고도 모든 것을 이해해주었다고 했습니다. (...) 그녀는 현실의 프리다 칼로의 손을 꼭 잡아줍니다. p. 94-95

 

: 그녀 그림에 숱하게 등장하는, 프리다를 위로해줄 수 있는 또 하나의 프리다의 존재를 나는 조금도 손상된 바 없는 그녀의 영혼 자체라고 여긴다.

 

 






그게 아니고요. 나는 그려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린 것입니다. 그림이 그나마 진통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p.165

 

: 고통의 극에 다른 이에게 예술은 퇴로가 차단된 유일한 길이요 동행자가 된다.

 

 

가장 좋은 친구에게 사랑을 다하는 그녀의 방식은 조금의 거짓도 없이 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프리다 칼로가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상대방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고,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것을 배려라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과는 조금 다릅니다. p.214.

 

: 가식이란 것 또한 아직 살만한 사람에게 허용된 조건이다. 그녀에겐 이럴 여지가 없고 그럴 이유가 없다. 절박한 삶은 요만큼의 퇴로도 구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 후기는 출판사의 도서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온더페이지 #사이다경제 #채성모의손에잡히는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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