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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피! 미스트랄 - 덜컥 집을 사 버린 피터 씨의 일 년 기록
피터 메일 지음, 강주헌 옮김 / 효형출판 / 2022년 9월
평점 :

지금은 마침 11월, <아피!미스트랄>, 이 책의 독서란 일조량이 줄어들어 세로토닌이 떨어져가는 날들에 햇빛 충전이 되었다. <나의 프로방스> 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을 때부터 해서 세 번째로 읽는다. 앞선 두 번은 피터 메일의 위트와 감각에 둘둘 말려, 이번에도 역시 그의 시각과 표현에 감탄하면서. 소설보다 재미난 에세이라는 게 이런 작품일 것이다.
사실을 비추는 자기의 시선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묘사할 때만이 건져다 올릴 수 있는 생동감과 뉘앙스라는 게 있다. 자신의 감각, 시각에 충실하다면 소소한 일상에 대한 묘사도 충분히 ‘특별한’ 것이 된다. 이 작품 속에 묘사된 갖은 에피소드들과 인물들이 아주 예외적인 것이냐 하면 그렇지만은 않다. 그 바탕에서 보자면 지구 어디상에서도 벌어질 만한 일들이고 어디에고 있을 법한 사람들이다. 현실의 자잘한 잇속들 속에서 자신만의 우선 순위에 따라 움직이고 반응하는 인간 사회의 풍속도이다. 프로방스 사람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인정 많아 천국같이 다정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도 아니고 가슴 뭉클한 감동이 저변에 흐르는 것도 아니다. 저자가 프로방스에 정착하던 딱 그 1년의 기후와 사람의 풍속화를 그려낸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 속엔 이상한 정이 흐르고 그 전체 톤이란 이 작품에 곁들여진 수채화의 색조처럼 면면히 따듯하며 무언가 특별하다. 내가 앞서 부정한 바로 그 모든 면모를 지닌다. 여기에 마술이 도사려 있다. 이 이야기는 실생활을 근거리보다도 가까운 저자의 내면으로부터 묘사했을 뿐임에도 전체적으로 어딘가 ‘동화’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느껴지는 이유를 ‘주체’와 ‘환경’을 언급하여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피터 메일과 그의 이웃들, 프랑스 그 중에서도 프로방스, 이렇게 만나질 때 실실 웃는 석류처럼 뿜어나는 과즙이 발생한다는 것을!
피터 메일의 위트가 정확히 영국적인 것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처음으로 이웃들과 함께 한 식탁에 대해서 ‘그날 밤 우리는 영국을 대표해서 먹었다.’고 표현하였듯, 프랑스인들에 포위된 그의 입지는 ‘영국인’의 그것이 된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을 나도 프랑스에서 체득했다. 이국이라는 낯선 환경 속에 놓일 때 한 개인의 소속 국가 정체감은 나라 안에 있을 때의 몇 배가 될 수밖에 없다. 우선은 나를 포위한 이들이 나를 ‘한국인’,‘영국인’ 이런 식으로 인지하고 말을 하는 것도 큰 몫이다.

그러면서 아이가 처음 태어나 이 낯선 세상을 처음 살아갈 때 모든 디테일이 커다랗고 생경하게 피부에 와닿듯, 새로운 생활에서 겪는 사사건건의 느낌이 매우 선명해진다. 여기에 조명이 가해지면 겪어가는 그 모든 게 과연 특별한 것으로 인지되고 표현된다. 저자가 환경과 마주한 입지에서 프랑스인들과는 대비되는 면모가 매 챕터마다 콘트라스트를 이룬다. 파티에서 영국인들은 술잔을 한 손에서 놓지 않는 반면 프랑스인들은 받자마자 테이블 위에 놓고서 나중에 자기 잔 찾기 난감해한다. 프랑스인들은 대화할 때 두 손을 다 써야만 하기에 이런 일이 생긴다. 여기에다 또 빠질 수 없는 프랑스인들의 이상한 서류 사랑과 엄청난 식도락, 기타 등등!!

프랑스인들의 일반적인 성향에 덧붙여 프랑스에서도 남쪽으로 오면 더 느껴지는 정감이 있다. 뺨에 입맞추는 비즈(bise) 또한 파리처럼 두 번에 그치지 않고 세 번이라는 것도 일례랄까? 그리고 프로방스라 하면 도무지 빠뜨릴 수 없는 일조량과 악한과도 같은 바람 미스트랄. 효형 출판의 새로운 판본 제목이 <아피! 미스트랄>인 점도 무척 특별하다. 프로방스 지역에서도 가장 암울하고 고통스런 요소로 자리 매김될 미스트랄 앞에 ‘해피!’를 붙였다는 것이 역설적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모든 게 정해놓은 듯 잘 흘러가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예측할 수 없기에 삶이 현재적으로 되며 리듬이 한껏 느긋해지는 프로방스의 기후와 인간의 풍광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낼 수 있을까?

이러한 삶의 조건을 처음으로 마주 대하는 그 1년 동안 필자는 프로방스에서 시간을 주나 달 단위가 아니라 계절 단위로 헤아리는 감각을 배운다. 급해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법이니까. 프로방스인들이 특별히 낙천적이고 느긋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며 체득된 방식이었으리라. 이로부터 낙천성의 정의까지 돌아볼 수 있을 듯하다. 낙천성이란 게 오로지 모든 일이 잘 되리라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이 닥친들 마음을 내려놓고 그것에 역행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사려일지도 모른다는. 이러한 태도를 장착하기까지의 날들을 저자는 철학자가 아닌 풍속 수채 화가로서 그려 보여준다.
그렇게 피터 메일과 그의 아내는 새로운 삶의 리듬을 터득해간다. 물론 여기엔 미스트랄 바람 뿐 아니라 그가 ‘신경 안정제’라 말하는 햇빛의 역할도 크다. 햇빛과 바람이 이루는 기후가 얼마나 사람을 바꾸어놓는지 나 또한 겪은 바 있다. 피터 메일이 불르 놀이 도구를 습기 많은 영국에선 처박아 두었다가 건조한 프랑스 기후에선 꺼내놓게 되듯이, 김화영 선생님이 프로방스의 햇빛을 처음 만난 느낌을 ‘행복의 충격’이라 표현하였듯, 내가 남프랑스에서 처음 만난 햇빛 또한 ‘쳐들어오는 치유제’였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남프랑스에 대한 책을 쓸 때 나역시도 햇빛 찬양을 도무지 빠뜨릴 수 없었다. 음울한 기후 속에 사는 영국인들이 이 햇빛을 얼마나 밝히는지도 겪었다.

10년 전에 읽었던 표지와 제목, 산뜻하게 리뉴얼되었다!
너무도 많다. 곱씹으며 깔깔대고 두고 또 읽게 되는 구절들이. 언급하자면 끝도 없이, 이 풍경화와 풍속화가 주는 소소한 매력은 읽어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끝으로, 피터 메일의 감각이 빛나는 수많은 표현들 대신, 저자가 수렴하는, 어쩌면 가장 수사 없이 평범한 행복의 구절을 하나 흘리며 맺으려 한다. ‘태양은 대단한 신경안정제였다. 이러한 행복감에 젖어 시간은 흘렀다.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너무 즐거워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이 길게 천천히, 움직이지 않는 듯이 흘러가는 나날이었다.’(p.254)
이런 햇살 속에서 빚어진 최상의 올리브유에 나도 토마토 소스를 바른 빵을 찍어먹고 싶다. 저자처럼 햇살 만끽, 올리브유 사냥을 하고 싶어진다. (‘그날 저녁 우리는 식사 전에 그 올리브유를 시험해보았다. 토마토 과육을 살짝 바른 빵에 올리브유를 몇 방울 떨어뜨렸다. 마치 햇살을 먹는 기분이었다.’ p.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