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
브루스 고든 지음, 이재근 옮김 / IVP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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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칼뱅을 버리고 무엇을 얻었을까?”

 

첫 질문이 모호하면서도 도발적이라서 마음이 불편하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하지만 나는 조국교회를 볼 때마다 이 질문 앞에 답답한 감정을 숨길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인정하듯이, 한국교회 내에서 장로교의 교세는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교세를 제외하더라도 상당수의 개신교인들은 장로교의 전통, 나아가 장로교의 신학을 지탱하는 칼뱅이란 인물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 성결교 전통의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동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인 필자 또한 신학교 초년생 때 가장 먼저 한 독서는 루터 저작에 대한 요약집과 더불어 칼뱅의 기독교 강요 요약집(혹은 라틴어 직역본)이었다는 것을 보자면, 칼뱅이란 신학자는 장로교를 넘어 개신교회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칼뱅을 누군가는 신격화하고, 누군가는 그의 삶을 폄하해왔다. 중립적이란 표현은 유명무실했고, 그의 삶을 그 자체로 보려는 자정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동감하며 반성할 뿐이다. 필자도 돌아보면,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의 모습이 오만하단 생각으로 인해 칼뱅이란 인물 자체의 삶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기회가 되어 이번 신간 <칼뱅>을 읽을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이 기회를 통해 편견의 시선을 돌이켜 개신교 신학의 선구자 혹은 출발자정도로 치부하던 타 교단의 신학자 칼뱅에서 (책 옆면의 문장처럼)신앙의 자유를 위해 제네바로 향했던, 복음을 위해 일생을 바친 투쟁자칼뱅으로, 그의 열정과 개신교회에서의 확고한 그의 위치를 인정하고자 한다. (물론 내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칼뱅은 개신교회 역사상 위대한 신학자이자 종교개혁자 중 한 명이지만, 존 웨슬리에서 마틴 냅으로 이어지는 한국성결교회의 신학 계보에서 칼뱅의 위치는 어떠한지 묻는다면 오히려 또 다른 종교개혁자 루터보다도 그 연관성을 이야기 하는 이들이 적을 것이다. 이 부분이 각 교단별로 대화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갈림길이라 본다. 우리는 칼뱅을 버리고 무엇을 얻었을까?)

 

전체라 말할 수 없지만, 조국교회 내에서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일부 신학도들의 배타성과 칼뱅을 제네바의 도살자정도로 폄하하던 (나를 포함하여) 신학도들의 편견과 무지는 칼뱅의 사역과 삶을 공평하게 볼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 물론 그는 결단코 온전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의 삶이 수많은 비판점과 논쟁거리로 가득하다는 점은 이 책의 저자 브루스 고든또한 매 장마다 인정하는 부분이다. 다만, 그는 온전할 수 없었던 한 인간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을 향한 일생을 보여준 개신교 신학과 스승이자 믿음의 선배였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으로 인해 주님께 감사드린다. 주님께서는 역사를 통해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허락하셨는데, 격동의 종교개혁 시대에도 여전히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칼뱅의 투쟁과 더불어 그가 지녔던 여러 부족한 점들 또한 보이셨다.

 

저자는 머리말은 통해 칼뱅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도구이자 어떤 경장자도 허용치 않는 교회의 예언자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이 문장을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 뿐 아니라 아나뱁티스트 등 복음을 나약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모든 이들을 증오한 그의 태도는 이러한 자기인식과 연관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여러 부족한 점을 그저 비판점으로만 두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그가 지닌 마음가짐과 환경의 결과로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을 들춰보는 것이야말로 그에게서 배울 점을 취하고, 그의 부족한 점은 어떻게 보완하여 개신교회의 신학을 발전시킬지 고민하는 자세라 본다. 그의 부족한 점이 부끄럽다고 숨기지 말았으면 한다. 필자가 속해있는 성결교회 또한 존 웨슬리의 신학과 전통을 받아들이고 있고, 그는 모두가 잘 알 듯이 그의 일생에서 눈에 띄는 실패와 더불어 현대 신학으로 보자면 비판점이 가득한 주장을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주어진 시대에서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자신의 최선을 일생을 통해 보였다. 그리고 존 웨슬리 이전에 태어난 칼뱅 또한 웨슬리 이전에 개신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순수성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할애한 인물이다. 그의 삶은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부정할 수 없는 우리 개신교회의 역사다.

 

우리는 신간 <칼뱅>을 통해 기존 칼뱅의 일생을 다루던 서적들을 새롭게 하는 최신 기록이자 그를 무오한 개혁자이거나 종교개혁의 수혜를 받은 학살자라는 무지와 편견을 벗어날 기회를 얻었다. 그렇기에 이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2017,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 글이 쓰여진 2018년의 연말, 그리고 현재의 2019. 조국교회는 종교개혁과 관련된 모습으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 500여 년 전 시작된 종교개혁과 그 이후 자신들의 일생을 다해 종교개혁을 완수하려던 이들의 희생과 노력에 부끄럽지 않은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가? 루터와 칼빈, 웨슬리 등 교단의 시작을 알릴 인물들의 이름만 남겨둔 채 그들은 지우고 “OO주의라는 타이틀에 갇힐 것인가? 우리의 닫힌 지성과 마음은 결국 또 다른 종교개혁의 단초를 만들 것이다. 세상이 타락해서 종교개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세상이 타락할 때에 주님의 몸된 교회가 소금과 빛(5:13-16)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와 상관없는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잊지 않았으면 한다. 칼뱅이 자신의 부족함을 알지 못했겠는가? 이 책 속에 칼뱅은 결코 온전한 자가 아니었다. 온전하지 못한 시기에 온전하지 못한 자였던 칼뱅.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향한 열정, 복음의 열정으로 사로잡혀 그의 일생을 불살랐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록을 오늘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여전히 칼뱅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 각자의 몫이다. 이 책을 읽고서도 칼뱅이 무류한 존재로 느껴지거나, 학살자일 뿐이다 판단된다면 필자는 여러분의 생각을 좌지우지 할 권한이 없다. 다만 필자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그렇게 단정할 것이라 보지 않는다. 정말 이 책을 주님이 주신 지식과 지혜로 성심껏 읽는다면, 양 극단에 빠지는 무지와 오류는 얼마든지 수정 가능하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확신한다. 필자 또한 칼뱅에 대한 기존의 무지와 오해를 이번 신간을 통해 고칠 수 있었다. 칼뱅을 이해하면서도 비판의 끈을 놓지 않는 브루스 고든의 모습은 탁월한 번역을 선사하신 이재근 목사님의 번역에 힘입어 우리의 마음에 분명한 찔림을 준다. 오늘 이 책, <칼뱅>을 추천하며, 이 책을 통해 교회의 회복과 일치를 위해 때로는 험한 말을 아끼지 않았던 칼뱅의 모습에서 배움을 구하고자 하는 모든 예비 독자와 조국교회의 지체들에게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함께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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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로 사는 이유
에버하르트 아놀드 지음, 김순현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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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많은 곳에서는 새롭게 자신들의 모임이나 회사에 일원이 된 이들과 기존의 이들을 연결하기 위해서 오리엔테이션이든 멤버십 트레이닝 등 다양한 행사와 기획을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일시적인 노력들은 당장의 성과를 위한 모임에 그치는 일회성 행위들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한 마디로 형식적인 행위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정말 "공동체란 무엇인가? 왜 공동체여야만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들에는 답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 신간 <공동체로 사는 이유>는 독일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설립자인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자전적인 고백으로 이뤄진 "공동체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선포"이다. 특별히 이 선포는 개인화와 타자 배제가 일상화된 오늘날의 모습이 진정 옳은 모습의 사회인지 되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사실 공동체란 단어는 한국 개신교회에서 멀지 않은 단어다. 성경학교나 수련회 때마다 공동체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일상화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한국교회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면서도 공동체로 함께하는 것에는 언제나 뒷짐만 지게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기억하는 공동체들은 가톨릭교회의 수도원 공동체나 개신교회 안에서도 성공회-루터회 공동체 정도이다. 한국교회는 초대교회적인 영성과 교회관을 지지한다고 많은 설교를 할애했지만 실상은 사도행전 2장 속의 초대교회의 모습은 표어로 그쳤던 것이 사실이다. 교회만은 달라야 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교회 안에서도 공동체란 이름으로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은 우리가 반성해야할 과거가 아닐까?


이 책의 저자 "에버하르트 아놀드"는 총 11가지의 주제를 통해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들의 종합은 바로 "우리와 함께하는 예수"라고 본다. 공동체로 함께한다는 것은 서로를 존중하고 섬기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곳에는 예수가 함께하신다. 예수가 필요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를 찾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나아가 예수가 바로 공동체를 이루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를 통해 예수를 본다. 


배제와 혐오가 가득한 시대를 살아갈 때에 우리는 예수를 그리워한다. 온 세상이 내게 친절하지 않던 때에, 먼저 사랑하신 그 분의 마음에서 우리는 공동체를 향한 갈망을 느낀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화목하게 된 우리가 하나로 모일 이유를 한 문장으로 정의해야한다면, 바로 "이 곳에 계신 예수"라 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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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바위, 시간 - 지질학적 증거에 기반한 지구 연대 논쟁
데이비스 영.랠프 스티얼리 지음, 김의식 옮김 / IVP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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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은 곧 과학적 합리성을 부정하는 것일까?”

 

이번 서평을 준비하며 올해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직면한 학문적 결핍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난 4년간의 신학대학교 재학 중, 나는 성서의 창조를 믿으면서 <과학과 종교의 대화>라는 수업을 통해 알게 된 브라이언 그린을 통해 쿼크나 힉스, 초끈 이론이나 M 이론 등의 양자역학의 영역에 조그마한 관심을 가져왔다. 사실 이러한 관심은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을 돕기 위한 학문적 관심은 아니었다. 합리적인 신학도이자 신앙인으로 보이기 위해서 양자역학자들의 이론을 우주론에 대입해보기도 하고, 알리스터 맥그래스 같은 저명한 신학자의 저서를 쌓아두고 읽으며 그들의 신학적 작업이 나와 동일하다는 것처럼 포장하기도 했다.

 

서평의 첫 단락부터 자기반성을 하는 이유는, 나의 신학적 무지함으로 인해 젊은 지구 창조론은 성서를 절대 무오로 믿는 이들에게만 국한되는 일이라는 그동안의 오만함을 보수적인 신앙을 견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나는 창조에 관해 이렇게 생각해왔다. “창조에 대해서는 신앙으로 믿으며, 창조에 대한 탐구는 합리적으로 열려있다.” 이 말은 스스로에게 창조 신앙을 지니고 있다는 안정감을 갖게 했고, 사회적으로 지탄 받던 젊은 지구 창조론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합리적 신학도의 이미지를 굳히기 위한 것이었고, 나의 성서 이해는 현대의 과학적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일말의 우월의식이었다. 이 자리를 통해 성서를 하나님의 무류한 말씀이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사과를 드리고 싶다.

특별히 나는 이번 신간 속 보수적인 그리스도 신앙을 지닌 두 저자, ‘데이비스 영랠프 스티얼리박사가 진실한 신앙 위에서 창조를 위한 지구 연대 논쟁을 우리에게 소개해준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은 이후 논의될 내용을 제하더라도, “보수적인 신앙이 곧 창조과학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기본적이지만 신학적 편견에 의해 쉽게 무시되어지던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이 책을 통해 변화된 스스로의 소감은 이 정도로 하고, 지금부터는 <성경 바위 시간> 속 살펴볼만한 포인트들을 각 장마다 간략히 이야기 하고자 한다.

 

1부는 역사적 관점을 통해 보는 지구 연대에 관한 이야기다. 이를 위해 각 시기별로 지질학의 발전과 이에 따른 논쟁이 함께 담겨있다. 특별히 현대 지질학이 출현한 이후 지질학과 성서(성경) 사이의 간극은 더욱 분명해져갔다. 이 간극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조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두 세기 전부터 영미-유럽권 교회들에서 논의되어지던 내용이었음을 확인하면서 배우는 점이 크다. 오늘 우리가 치열하게 젊은 지구 창조론의 망령과 논증하는 것이 이전부터도 이어졌다는 사실은 지긋지긋함보다는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를 바로 이해하기 위한 기나긴 여정으로 본다면 우리 세대에는 하나님의 창조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가능성을 기대하게 된다.

 

따라오는 2부는 성경적 관점을 통해 보는 지구의 태고성이다. 1부의 마지막 소제목이 지구의 태고성이었고, 그 내용이 20세기부터 현재까지의 연구인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2부에서 지구의 태고성을 성경, 성서적 관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지질학의 역사성에 비춰서 상호 비교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성서 해석은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성서의 본연의 가치를 탐구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성서 해석이 모든 부분을 시대의 변화에 맞춰 양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비는 과학과 문화적으로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이 이번 장의 마지막과 함께 독자의 머릿속에는 분명히 떠오를 것 같다. 그 생각은 보수적 신앙의 그리스도인이나 성서 해석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그리스도인들에게나 동일할 것으로 판단된다.

 

성서와 역사 속에서 잠시 잊혀진 부분이 있다면, 이 책의 저자들은 지질학 박사이자 교수라는 점이다. 3부의 목차를 읽자마자 이전까지는 개론이고, 이제부터 본격 강의 시작인가?”하고 스스로 묻게 되었다. 쉽게 말해, 지구과학 이후에는 우리가 단편적으로만 정보를 얻던 지질학의 소재들과 용어들이 이번 장에는 즐비하게 등장한다. 이번 장의 마지막 부분이 방사성 연대 측정에 관한 이야기들이기에 이번 장이 흥미와 당혹감을 오가는 기분을 독자들에게 선사해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자면, (지질학이나 인접학문을 연구하거나 관련직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을 제외한)우리가 이 기회가 아니면 창조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들 가운데 지질학이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을 따로 찾기에는 제한 사항이 있다. 이번 장이 책에서 가장 두꺼운 부분을 차지하며 다소 생소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창조에 대한 관심이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내용들로만 구성된다면 이것 또한 창조를 이해하는 시선을 가둬버리는 제약이 될 것이다. 지질학을 이해하는 쉬운 길은 이 책을 읽었지만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다. 다만 쉬운 길은 모르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지질학자들이 미시간 분지와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통해 지구의 역사를 탐구하고 탐험하는 이 이야기들이 다른 대륙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생각의 여지와 즐거움을 주는 것은 참 특별한 경험이다. (책에 있는 이 지역들의 사진을 보고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서 모 포털 사이트를 통해서 찾아보았는데, 컬러로 보니 자연의 광대함과 이러한 세계를 창조한 이가 다른 곳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에서 오는 감동이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4철학적 관점이다. 사실 지구의 태고성을 탐구하는 일에 철학적 개념이 사용된다는 것에 놀라움이 있었다. 사실 역사적-성경적-지질학적 관점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기본적인 이해는 있었기에 저자들이 주는 정보들을 습득해서 나의 지식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4부에서 이야기하는 철학적 관점은 들어봤지만 이 개념이 이렇게 적용될 수 있어?”라고 스스로 되 물으며 쉽사리 책장을 넘기지 못한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철학은 어렵다라는 스스로의 성급한 결론이 다양한 분야에서 철학의 개념이 이미 적용되고 있음을 놓친 것 같다. 비록 철학적 관점에 대한 오해로 4부의 시작을 열었지만, 읽어가면서 이번 장이 왜 마지막에 위치하였는지 깨달으며 마치게 되었다. 이 책의 곳곳에서 이미 젊은 지구 창조론의 오류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4부에서는 이를 보다 분명히 지적하면서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눈가리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용 가능한 지질학적 증거의 총체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 책의 주장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지질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입문서로 쓰기에 적절하다. 뻔한 말일 수 있지만, 이 책을 구입해서 읽게 될 독자들은 단순히 지질학에 입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만 이 책을 구입하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창조에 대한 이해를 위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과학과 멀리 있지 않음을 알고 싶어서, 하나님의 창조를 가까이 하고자 하는 노력들 가운데 이 책을 집게 된 이들에게 해답은 아니더라도 해답으로 향하게 하는 성서와 더불어읽을 만한 책으로 적극 추천한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에는 양승훈 교수의 해설이 담겨져 있는데, 이 책을 정독하기 전 예습을 위해서나, 읽고서도 여전히 남는 의문들을 정리할 때, 핵심적인 부분들을 다시 생각하고자 할 때도 참 유익하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창조에 대한 고민이 양승훈 교수에게도 동일하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해설 속에서 묘한 동질감과 더불어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지혜 또한 얻어갈 수 있다.

 

성서를 해석하는 시선과 신앙이 다르듯 창조를 이해하는 견해들이 다름을 더욱 분명히 깨닫는 오늘날이다. 분명한 점은 이 책을 읽고서 하나님의 창조가, 그리고 이 지구가 우리의 단순한 셈법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확신이 드는 분들에게나, 앞서 말한 눈가리개를 여전히 벗길 거부하는 분들에게나 이 땅은 소중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 이 땅은 하나님의 창조의 땅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견들이 창조의 땅을 설명하고자 자신들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한 가지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신앙하는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왔던 과학, 특별히 지질학의 발견을 무시하거나 하대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것은 신학을 전공하는 나에게나 신앙 안의 지체들에게는 어려운 부분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의 어떠함을 떠나 성서 고유의 가치와 전통을 존중함이 훼손될 것을 항상 염려하고 경계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염원을 가지고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변치 않는 신앙을 유지하고 이 신앙을 후대에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우리의 이 마음과 이 태도는 충분히 존중받고 앞으로도 이어가야 할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인도하고 계신다는 신앙처럼, 우리는 창조의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놀라운 창조의 세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성서뿐만 아니라 창조의 세계,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또한 이 땅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의 수고는 성서 해석을 위해, 그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힘쓰는 우리의 최선만큼 존중되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이 단순히 젊은 지구 창조론의 카운트 어택(반격) 정도로 그치지 않길 바란다. 창조하신 이를 알기 위해 수고하는 이들이 창조하신 이가 만드신 땅에 대해 무지하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이다. <성경 바위 시간>을 통해 이 땅에 있는 모든 현상, 특별히 지구를 이해하기 위한 우리의 최선이 하나님을 열망하는 우리의 신앙만큼 자라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도한다.

 

창조의 땅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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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 - 토르, 로키, 오딘에서 라그나로크까지
이경덕 지음 / 원더박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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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사용하고있는 CellPhone 속 블루투스. 이 이름은 어디서부터 유래했을까요? 그렇다면 토르와 오딘의 이름은? 무척 흥미로운 일상 속 이름들의 기원을 찾아 떠납니다! 무엇보다 북유럽은 개신교회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국가교회들이 위치한 곳인데 어떻게 신화를 잃지 않고 오늘까지 왔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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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 마르크스와 다윈의 저녁 식사
일로나 예르거 지음, 오지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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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에서 이 두 인물을 다룬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불온하고, 저급하며, 신앙을 마비시켜 결국엔 이성적 판단을 이데올로기로의 판단으로 바꿀 것을. 그런데 재밌다. 그런 마르크스-다윈 혐오증의 개신교회는 오늘날 가장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집단이 되었다. 밥 먹고 싶다, 그들과.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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