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개정판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한 남자가 아무 이유 없이 모르는 여자를 죽이는 살인사건이 있었다.

우연히 당시 읽고 있던 책은,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이었다.


  

이른바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이 책이 도전적으로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농축된 듯 한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읽혀졌다. 어떤 사회구조가 그 남자로 하여금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저지르게 했는가? 정신병이 있다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페미니즘의 도전>이 말하는 바에 입각하여 생각해보자. 그녀를 죽인 건 한국사회나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여혐, 즉 여성혐오라는 말이 많이 들린다. 다른 낱말들에 붙는 모든 혐오와 마찬가지로 여성에 붙는 혐오라는 말도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타자를 혐오한다는 건 스스로를 혐오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세상 누구든 정당한 이유없이 타인을 혐오하여 죽일 수 있는 권리는 없다. 국가라도 말이다. 그런데 자신을 낳아준 엄마와 할머니와 누이와 딸이라고 하는 모든 존재를 혐오할 수 있다는 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짓이다.

 

여혐은 무너진 가부장제 권력의 밑바닥에서 과거의 권좌를 아직도 그리워하는 남성들이 스스로의 얼굴에 내뱉는 침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이 변해(수많은 여성들의 희생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여성이 다양한 분야에서 기존 남성들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성취를 하는 세상이 왔는데, 문제는 남자들의 생각의 수준이 그걸 못 따라간다는데 있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렌트(전체주의 비판자이며 참여 민주주의 옹호자인 유대인 출신의 엿어 정치철학자)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여성주의라고 하면 일부 극단적인 기센 여자들이 여자의 권력 쟁취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라는 선입견만으로 세상 모든 여성주의를 재단하는 당신이라면 당신은 틀렸다.

여성주의란 양성 평등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사회 정의와 성찰적 지성을 위한 방법론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여성주의를 공부해서 손해볼 일은 없다.”(11p, 저자 서문에서 발췌)

 

그렇다. 우리가 모두 여성주의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제까지 잘 들으려 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는 것이다. 다른 목소리는 혼란이 아니라 다양성과 창조력의 원천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결국 여성주의란, 그동안 비장애인이며 이성애자인 백인남성의 시선에서 벗어나 장애인, 비이성애자와 백인이 아닌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어보자는 것이다.

책의 저자인 정희진마저도 강의 도중 장애인을 배려하지 못한 말로 난감한 상황에 빠졌던 경험이 있듯이, 우리는 나 중심의 시각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타인을 배제하는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배제가 모이고 모이면 혐오가 될 수 있다. 일베는 익명이라는 도피처에 배제라고 하는 무기를 들고 경멸이라는 유희를 즐기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비주류, 소수의견은 씹고 뜯고 죽여야 할 고깃덩어리다.

 

이 책이 얘기하는 것 중, 아니 여성주의가 주장하는 것 중 가장 논쟁적인 두 부분은 '2부 가정폭력의 정치학'과 '3부 성매매를 둘러싼 차이의 정치학'일 것이다. 글의 도입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성폭력에 대해서는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정폭력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일이라고 무시하기 일쑤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다가 죽이는 것은 과실치사지만, 아내가 정당방위로 남편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다. 가정폭력이 범죄가 아니라 일상이며, 일탈적 사건이 아니라 규범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에서 살해당한 여성들의 42퍼센트는 이전 또는 현재의 파트너에 의해 죽는다고 하니, 통계조차 없는 한국의 경우는 훨씬 더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맞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아내일 때에는 예외이다. 그 인간이 여성이라면, 맞지 않을 인간의 권리보다 여성으로서 참아야 할 도리가 더 강조된다. 여성은 너무도 쉽게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가정폭력 방지법으로 고소당한 폭력 남편들은 “(사람이 아니라) 집사람을 때렸을 뿐인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억울해한다.(140p)

가정폭력이든 성폭력이든 여성은 공(() 영역 분리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분되어 지고, 여성에게 행해진 폭력은 사적인 영역으로 분리되어 인권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사적인 영역에서는 폭력과 강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매매를 둘러싼 문제는 좀더 첨예하다.

20049월 성매매 방지법 시행 이후 여성들은 모두 만족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성판매 여성들의 거센 저항이 시작됐다. 생존을 위해 자발적인 성판매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개별적인 사항들을 무시하고 금지하는 것 자체가 인권 침해라고 주장한다. 여성이 성매매를 한다는 사실보다 성판매 여성에 대한 낙인이 더 여성 억압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성판매 여성을 바라보는 입장은 가부장제 시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비판마저 생겨난다. 그래서 작가는 성매매를 반대하는 여성운동이 다양화, 다원화되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물론 이런 여성운동의 다원화는 성별 의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성숙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요원하다.

 

남자로서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는다는 건, 오장육부를 다 해체하는 작업과 같았다. 나 하나 편하고자 나도 모르게 저질렀던 수많은 행동들도 가부장제 사회를 지탱했던 것들과 별반 다를 것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라면 이러해야 돼라는 말은 얼마나 수없이 내뱉었던지, 어머니의 희생은 왜 그리 당연한 걸로 생각했었는지, 회사 내 여직원들을 대할 때 난 얼마나 편견 덩어리였는지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성정치학' 말고도 우리 사회에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성정치학'이야 말로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겠다. 성정치학의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는 일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정치학을 공부한다는 건 여성의 인권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권을 공부하고 확보하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이야말로, 환경교육과 함께 초등학교에서부터 실시해야 할 전인적인 교육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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