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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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처음부터 찰떡같이 말하면 될 것을 굳이 개떡같이 말해 놓고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니 이 무슨 개떡 같은 소리란 말인가."
-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 中, 문유석 판사




<쇼미더머니>, <힙합의 민족>, <언프리티 랩스타>. '힙합'이 가장 힙한 콘텐츠인 최근 대한민국에선 여기저기서 랩퍼가 튀어나온다. 제각기 다른 스타일로 랩을 빠르게 뱉어내면서도 단어의 끝을 맞추며 '라임'으로 서로의 자웅을 겨룬다. 하지만 되도 않는 혀를 굴리는 수많은 랩퍼 지망생보다 사법부 판사의 새해 첫 칼럼에서 무릎을 딱 쳤다.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라임. 개떡과 찰떡의 아름다운 콜라보 속에서 깊이 뿜어져 나오는 촌철살인의 메시지!  모든 꼰대들에게 날리는 의미심장한 글을 읽으며 이 사람의 정체가 궁금했다. 가장 보수적이고, 가장 권위적이라 상상되는 사법부의 판사라니. '글쓰기 좋아하는 부장판사'란 흥미로운 타이틀에 끌려 자연스레 그의 소설 <미스 함무라비>를 손에 쥐었다. 온갖 꼰대들이 억지로 구매를 강요하는 책들보다는 훨씬 궁금했고 기대됐다.

소설의 주인공은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초임 판사 박차오름이다. 그녀는 첫출근부터 지하철 성추행범을 직접 검거하고 주위 시선은 깡그리 무시하고 초미니 스커트 출근도 개의치 않는다. 그녀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다. 법원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는 할머니의 억울한 사연에 눈물을 펑펑 흘리기도 한다. 서울중앙지법 44부 동료 임바른, 부장판사 한세상은 톡톡 튀는 그녀와 함께 산더미처럼 쏟아지는 일들을 우당탕탕 해쳐나간다. 제자를 성추행한 권위 있는 교수,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때리려다 흉기에 찔려 죽은 남편, 인턴사원에게 끈적한 카톡을 끊임없이 보낸 직장 상사. 실제 사건을 토대로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권위의 상징 '법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엿볼 수 있었다.

'#남혐_판사, #미스함무라비.' 주인공을 둘러싼 SNS의 유언비어를 보더라도 실제 현실과 매우 맞닿아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 전체가 너무나 톡톡 튀는 전형적인 캐릭터들 때문에 쉽게 빠져들진 못했다. 뭔가 2% 부족한 임바른과 박차오름 판사의 러브라인도 아쉬웠고, 극적인 이야기들은 전체적으로 이어보면 약간 심심한 맛도 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의 탄생배경을 들어보니 충분히 이해가 가더라. 소설인듯 실화같은 실화가 아닌 이 책은 한겨레 신문에 연재하던 연작 콩트였다. 법정 영화나 드라마는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지만 법정 소설은 흔치 않은 현실에서 각 에피소드마다 들려주는 현직 판사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무척 흥미로웠다. 각각 독립적인 사건들을 판결해나가는 신비로운 법원의 일과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신기하고 재밌었다.

현대사가 녹아있는 법복의 역사, 60년대 이후에는 사라진 법봉(땅땅땅 치면서 판결을 내리는 건 모두 상상이었다!), 재판 기록을 넘기는 데 필수 도구인 '골무', 김영란법으로 가장 유명한 최초의 여성 대법관 '김영란', 실제 있는지 가장 궁금한 '전관예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판사'의 삶을 조금이나마 훔쳐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국민참여재판을 보면서는 선동에 취약한 민주주의의 허점을 느낄 수도 있었다. 첫 출근에 기대와 에너지로 넘치는 박차오름이 서서히 스트레스를 받으며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모습은 <미생>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  대놓고 앞길을 막는 장벽이 너무나도 많은 게 헬조선 대한민국이다. 누구나 선망하고 인정하는 판사란 직업을 시작하지만 결국 조직의 경직성에 무릎꿇는 개인의 소신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그렇기에 읽는 내내 소설이라기 보다는 수기라 느껴질 정도였다.

그저 돈을 벌어먹고 사는 직업이 아닌 소명의식이 필요한 직업 중 하나가 판사라고 생각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업무량과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판사라는 직업은 다름 아닌 타인의 인생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권력'은 공정한 법의 잣대 위에 있으므로 자연스레 '책임'으로 치환된다. 요즘 사법부의 권위가 떨어졌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하지만 '신전에서 내려와 광장으로 나오자'는 '꼰대인 걸 알아서 꼰대가 아닌 꼰대' 문유석 판사의 말처럼 조금 더 국민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귄위는 자연스레 올라갈 것이다. 결국 법을 집행하는 역할인 판사의 뿌리는 그 법을 만드는 주권자인 국민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상에서 지나치는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요소들에 목소리를 높일 때 판사는 조금 더 공감이 갈만한 판결로 화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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