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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담이다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2
김중혁 지음 / 민음사 / 2016년 8월
평점 :
스탠드업 코미디언, 우주비행사, 낙하산 수리공.
소설가 김중혁이 만든 세상에는 언제나 색다른 직업군이 등장한다. 인터넷 공간에 남아있는 흔적을 지워주는 '딜리터'(<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독창적인 보드게임으로 대박낸 사업가(<미스터 모노레일>), 심지어 좀비(<좀비들>)까지. 마치 잡지사 기자, DJ, 팟캐스트 진행자, 작가, 라디오PD 등을 넘나드는 본인의 다방면의 활약상처럼 소설속 캐릭터들 역시 독특한 직업을 자랑한다. 그의 네번째 소설 <나는 농담이다>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보다는 천조국에 어울리는 스탠드업 코미디바가 등장하고, NASA나 영화 속에서나 접했던 우주비행사도 나온다. 낙하산 수리공이란 생소하고도 접하기 힘든 직업까지. 치밀한 자료 조사로 탄생한 사실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이번 소설의 무대는 바로 우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농담' 속이다.
관제 센터, 들리나?
고요하다.
사령선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계기판도 먹통이 됐고, 수신되는 메시지도 없다. 기내 산소량은 25퍼센트. 수동 제어하고 있지만 방향을 확인할 수 없다. 우주복의 생명 유지 장치는 이상 없다. 앞으로 12시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급하게 나오느라 자살 캡슐을 챙겨 오지 못한 게 안타깝다. 농담이다. 마지막까지 신나게 즐기다 가겠다. 만약 관제 센터가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면, 동료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들 잘못이 아니야.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후회는 없다.
--- p.11
우주비행사 이일영은 사고로 인해 광활한 우주를 떠다니며 죽음을 마주한다. 하지만 관제센터에 끊임없이 시덥지 않은 농담을 날리며 지구를 그리워한다. 우주에 대한 막연한 본인의 감정부터 남겨둔 이들을 그리워 하는 편지 등 내용은 무척 다양하다. 하지만 농담에 서툰 그의 농담은 재밌다기보단 애틋하다. 반면 '농담'이 곧 직업인 프로페셔널 송우영은 다르다. 더러운 화장실 유머부터 남녀를 가리지 않는 섹스코미디는 연타석 홈런 수준의 타율을 자랑한다. 낮엔 컴퓨터 A/S 기사, 밤엔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일하는 송우영은 이일영의 이복형제다. 일영의 정확한 존재 조차 몰랐던 그는 죽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편지를 발견한다. 부치지 못한 편지가 일영 앞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고민하던 중 그를 찾아나서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스탠드업 코미디바 동료 세미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서서히 인연에 가까워진다.
여긴 우주 한가운데다. 우주선 밖으로 나왔다. 이상한 말이지만 한가운데 있는 것 같다. 여긴 빛도 없고, 소리도 없고, 중력도 없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조용하다. 아무리 달려도 어디로도 닿지 못할 것이다. 우주정거장에서도 유영해 봤지만 기분이 완전 다르다. 그냥 완벽한 어둠 속에서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정말 굉장하다. 내가 없어지는 것 같다. 이대로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꿈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꿈보다 더 꿈 같다. 거리 감각도, 공간 감각도, 모두 사라진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내가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위치가 소용없어진다. 나는 그냥 흐름 속에 있는 것 같다. --- p.95
지구와 우주가 교차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이어진다. 마치 그들이 대화를 나누듯 서로를 향해 가까워지는 과정은 몹시 흥미롭다. 지구에서 펼쳐지는 우영의 이야기는 하얀 페이지에, 우주에서 보내는 일영의 메시지는 밤하늘의 별처람 까맣고 먹먹한 검은 페이지에 써내려갔다. 자연스럽게 교차되는 그들의 이야기는 묘하게 이어지며 마치 대화를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가다보니 우영은 잊고 지낸 형의 따뜻하고 신념있는 발자취를 따라간다. 어머니의 만류가 자꾸 눈에 밟혔지만 평생 꿈이었던 우주로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그는 동생처럼 신념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동생 역시 자기만의 방식대로 '웃픈 현실' 속에서도 이를 웃음으로 승화시킬 건덕지를 습관적을 찾아낸다. 그의 스탠드업 코미디는 마냥 알맹이가 없는 심심풀이 땅콩 말장난이 아니다. 그의 상처, 아픔, 그리움, 후회를 발판 삼아 타인에게 웃음을 주고 본인을 치유한다. 남을 깎아내리는 유머는 무척이나 쉽지만 수준 낮은 비난에 불과하다. 하지만 본인의 슬픔 속에서 피어난 유머에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블랙 코미디는 예술과 맞닿아있다.
"서 있을 때만 웃기는 건 아니지만, 서 있을 때 가장 웃긴 건 확실합니다. 앉아서 대화를 나눌 때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일어서는 상상을 하는데요. 상상만으로도 이야기가 잘 됩니다. 이야기라는 놈은 직선으로만 움직이는 모양이에요. 그런 면에서 전파를 닮았죠. 우리가 빌어먹을 인공위성들을 만든 이유가 뭡니까? 전파는 무조건 직선으로만 움직이니까 그걸 지구 반대편에 보내기 위해 반사를 시킨 거잖아요. 제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이 인공위성의 역할을 대신하는 겁니다. 자, 모두들 인공위성을 하늘로 올려 볼까요? 아, 여기 앞에 앉아 계신 분은 아폴로 13호를 닮았네요. 얼굴이 터질 것 같아요. 얼굴이 터져도 나사(NASA)를 탓하지는 마세요.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 p.13
<마션>, <그래비티>, <인터스텔라> 등 우주 영화가 성공 행진을 이어가는 요즘 <나는 농담이다>는 훌륭하고 잘 짜여진 웰메이드 우주 소설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쉬지않고 드립을 멈추지 않는 코미디가 깔려있다. 사실 '스탠드업 코미디' 자체를 떼어놓고 보더라도 무척 웃기고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더러운 유머에 웃는 건 모두가 자존심 상하겠지만, 걸쭉한 가래침을 뱉었다가 변기 사이에서 화창한 무지개를 피는 이야기엔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다. 넷플렉스를 통해 틈틈이 갈고 닦은 김중혁표 활자형 '스탠드업 코미디'는 그 자체로 재밌다. 하지만 그냥 휘발성이 큰 말장난이 아니라 송우영과 이일영, 그리고 어머니의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이면 여운이 깊이 남는다. 떠난 자와 남겨진 자, 그리고 그들이 공유하는 추억과 감정은 '농담'속에서 재회하고 다시 살아난다. 휘발성이 짙은 활자들의 홍수 속에서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는 건 그 안에 따뜻함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말 속에 살 겁니다. 말 중에서도 농담 속에서 살 겁니다. 하나님은 농담을 거의 안 하시지만, 음, 기억나는 게 없긴 하죠? 하나님 농담만 따로 묶어서 책 내려고 준비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농담 속에서 살면 좋을 거 같습니다. 형체는 없는데 계속 농담 속에서 부활하는 겁니다. 죽었는 줄 알았는데 농담에서 또 살아나고, 평생 농담 속에서 사는 겁니다. 형체가 없어도, 숨을 못 쉬어도 그렇게 살면 좋겠어요. 비참한 사람들끼리 하는 농담들 속에도 있고, 계속 울음을 터뜨리다가 갑자기 터져나오는 농담들 속에도 있고, 여자와 어떻게 한번 해 보려고 작업하는 남자들의 농담들 속에도 있고, 오랜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여자들의 농담들 속에도 있고, 모든 농담 속에 스며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죽어도 여한이 없죠. 아니지, 참, 죽지 않는 거죠? 평생 거기서 살 겁니다."
김중혁처럼 '작가의 말'을 잘 쓰는 작가는 보지 못했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에서 "썼는데 누군가 지웠다."란 역대급 '작가의 말'로 소설 전체의 여운을 폭발시켰던 그를 보며 놀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번 소설에서는 작품을 관통하는 본인만의 스탠딩 코미디를 실었다. '작가의 농담'이란 말로 마감 이후 더 글을 토해내라는 편집자의 압박을 재치있게 비트는 김중혁. 그는 소설에 딱 어울리게 재치있고 유쾌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내 농담이 전 우주를 떠돌고 있으면 얼마나 기쁘겠어"란 대사로도 알 수 있듯이 농담처럼 쏟아내는 그의 이야기 보따리는 각박한 삶 속에서 조금이나마 쉼터 역할을 해준다. 부지런히도 글을 쓰고 또 다른 이의 글을 소개하는 와중에도 그는 농담을 멈추지 않는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흑임자 '김중혁'의 개그와 철학은 독서를 더 깊이 있게 다듬어준다. 그의 말처럼 웃음도 배우는 것이고 연습하는 것이다. 힘든 상황일 수록 자괴감에 빠지고 남을 탓하기 보다는 '우영'처럼 웃음으로 승화시켜 훌훌 털어버리고 싶다. 남을 웃기는 일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하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