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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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소설집에는 어딘가로 이동 중이거나 여전히 도착하지 못한 인물이 많고 외국, 공항이 배경인 작품들도 나와서 어울리겠다 싶었다. 구름이 떠가는 비행운(飛行雲)’이거나 타고난 행운을 얻지 못했다는 비행운(非幸運)’의 뜻이다.”"
 
세 번째 단편집만에 벌써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작가로 떠오른 김애란. 그녀의 글은 언제나 그렇듯 재밌고 발랄하면서 한편으론 씁쓸하다. '웃기다' '슬프다'의 조각을 한데 모은 신조어 '웃프다'의 감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가다. 그리고 그러한 아이러니한 감정은 다름 아닌 안녕하지 못한 21세기 우리 세대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 중 하나일 것이다. 막막한 존재들의 고립감과 갑갑함을 드러내는 글 속에는 묘하게 강렬한 페이소스가 존재한다. 그들은 항공기가 머나먼 곳으로 떠나며 흘린듯 남긴 가늘고 긴 비행운 같은 존재이자, 행운이 따르지 않아 번번이 실패하는 변두리 인생이기 때문이다. 지난 소설에서 자취방, 고시원, 편의점을 전전하는 20대에 주목했다면 이번에는 연령대와 활동 범위의 깊이와 넓이가 동시에 확장되었다. 물론 그들을 막연하게 동정하거나, 혹은 도와줘야한다는 시선으로 오만하게 바라보지 않아서 불편함이 없다. 그런 시선 자체가 그들에겐 상처가 될 수 있기에 그저 안부를 묻는 정도의 거리가 가장 적당하다. 물론 그 속에서 피어나는 강력한 유머감각, 건강함,활력을 터뜨리는 게 김애란 작가의 가장 큰 매력이다. 잘 지내라는 말조차 버거운 현실에서 김애란 작가는 최소한의 위로와 최대한의 공감을 건넨다. 마치 <서른>의 마지막 문장처럼.
 
"잘 지내요, 언니. 언니가 정말 잘 지내주었으면 좋겠어요. 기회가 된다면... 만일 그럴 수 있다면, 또 쓸게요, 언니." - <서른> 
 
저렴한 전세를 찾다가 재개발 지역에서 기어 나오는 무수한 벌레의 침입에 결국 결혼반지를 잃어버리고 양수까지 터진 임산부(<벌레들>), 모두에게 외면받다가 처음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지만 병으로 조선족 아내를 떠나보낸 슬픈 택시 운전사(<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거대한 공항, 가장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화장실에서 마치 없는 사람처럼 취급받는 청소노동자(<하루의 축>), 다단계 회사에 들어가 결국 모든 지인을 잃고 가르치던 학생의 자살 시도를 알게 된 여성(<서른>). 다른 단편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결코 다르지 않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래봤자, 채무자에서 조금 더 나은 채무자가 되어 네일아트를 처음 받아보는 회사원(<큐티클>), 어렵사리 해외 여행을 떠났지만 결국 친구와 다투며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호텔 니약 따>, 혹은 가장 극단적인 상황도 있다. 홍수 피해에 빠져 가족을 잃고 지옥같은 공간에서 부유하는 이(<물속 골리앗>)까지 등장한다. 하나같이 막막하고 무척 답답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막연히 "아프니깐 청춘이다", "긍정의 힘"따위를 전파하기 보다는 그저 공감하고 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소설의 몫은 다한 것이다.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갔겠죠?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 <서른> 
 
고독과 쓸쓸함이 묘하게 공감이 갔던 <하루의 축>, 영화의 한 장면처럼 캐릭터의 퀘퀘묵음이 떠오르던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좋았던 작품은 <서른>이다. 가족 Y의 일기에서 시작했다는 <서른>. 그녀의 언니가 느꼈던 감정의 다발에서 시작된 소설은 결국 지독하게 현실적인 민낯으로 거듭났다. 개인적으로 내년이면 서른을 맞이하는터라 더욱 애착을 갖고 글을 읽어 나갔다. 첫사랑의 권유로 다단계 회사에 들어가고, 사랑하는 제자를 대신 집어넣으며 개미지옥에서 빠져 나온 그녀. 이사, 아르바이트, 연애, 남들 다 하는 별 거 아닌 것들을 통과의례처럼 지나온 그녀는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돌아보니 추억이 아닌 헛된 결과만 남아있다. 다가올 날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언젠가부터 불안과 비관으로 가득한 시점이 아마 서른 즈음인 것 같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싱그러운 청춘이 지나고 지독한 현실에 마주하고 자기객관화를 펼쳐야하는 서른. 미성년자의 보호막도, 대학생이란 지위가 주는 변명거리도 더 이상 없는 맨몸의 존재. 나 역시 그리 특별하지 않은 길을 묵묵히 따라 걷다 보니 조금은 안정적인 위치에 서있더라. 물론 내가 꿈꾸던 엄청난 존재는 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되지 못할 운명일지도 모른다. 10대 때는 대학생이 되면 유창한 외국어로 대학생들과 정치, 경제, 문화를 주제로 열띤 토론을 펼치는 글로벌 인재가 될줄 알았다. 20대엔 회사에 들어가면 넥타이를 고쳐 메고 '대외비' 프로젝트를 놓고 경쟁PT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환상이 깨지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피곤에 쩔어 화장실 칸에 들어가 쪽잠을 자고,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생명연장을 위한 아이스커피를 쪽쪽 빨며 몰래 웹서핑을 하고 있다. '이도 저도 아닌' 부유하는 존재. 하지만 적어도 하루하루 닥쳐오는 변화무쌍한 일들을 부지런히 해치우다 보면 어느샌가 자라있는 나를 볼 수 있겠지.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겨우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더라도, 나를 바라보며 한걸음 한걸음 커가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모두에게 최고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만큼은 미래의 희망이자 목표가 되었으면 좋겠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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