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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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을 떠나며 챙긴 소설책은 김애란 작가의 <두근두근 내 인생>였다. 9월말에 토크콘서트를 가기전 그녀의 책을 다시 한번 읽고 싶기도 했는데 눈에 들어온 게 이 책이었다. 워낙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같은 강렬한 단편에 감명을 받았고, <눈먼 자들의 국가(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에서 담긴 가슴 먹먹한 글이 기억에 남았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사고도 이렇게 묵혀뒀던 이유는 아마 망한 영화때문일 것이다. 송혜교의 탈세 사건이 터지면서 이미지는 최악으로 떨어졌고, 영화는 빠르게 VOD로 안방에 퍼졌다. 물론 악평들만으로 편견이 생긴 것일 수도 있지만, 책을 읽기 전 상상의 나래를 펼친 공간이 제한적이란 점이 내 흥미를 반감시켰다. 우유부단 얼렁뚱땅 아빠 대수 의 헛발질을 보고 있으면 강동원이 생각났고, 욕을 내뱉으며 억척스러운 엄마로 커가는 미라를 보면 송혜교가 먼저 떠올랐다. 이미 정해진 이미지가 번지듯이 이어지는 탓에 사실 소설을 읽을 때도 흥미 요소 중 하나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으로 떠나는 중간 두바이 공항에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면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프롤로그를 읽자마자 천천히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새로운 책을 읽을 수 없는 여행의 특성상 스페인에서 읽을 거리는 <두근두근 내 인생>이 전부였고, 이런 몰입력이라면 하루만에 뚝딱 다 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
어리고 철없는 소년소녀는 17살에 아름이를 낳으면서 아무런 준비 없이 훌쩍 부모가 되었다. 결혼이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라면, 육아는 그 인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또 다른 힘이다. 점차 어른스러워지는 이 대수와 미라는 더 이상 꼬맹이가 아닌 조로증 소년 아름이의 '엄마, 아빠'다. 16살 아름이는 신체나이 80살이 되어버린 조숙한 아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낸 아름이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아이다. 처음으로 설렘을 경험하는 것도 역시 '글'을 통해서며, 부모님을 위한 마지막 선물 역시 본인이 쓴 '글'이다. 책을 읽고 나니 왜 영화가 실패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저 신파로 흘러갈 수 있는 난치병 어린이, 그리고 해줄 수 없는 것에 슬퍼하는 부모님, 이들을 돕기 위한 감동과 슬픔의 콜라보레이션 성금 모금 방송까지. 이런 뻔한 장치들을 유쾌하고 가슴 먹먹하게 만들어 주는 건 오롯이 '글'이 지닌 강력한 힘이었다.

단편에 강한 김애란은 첫 장편인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도 재기발랄함을 잃지 않았다. 게다가 마지막 <두근두근 그 여름> / 한아름은 또 하나의 단편이 아닌가? 애늙은이라 놀림받지만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이같은 아름이에게 책은 더할 나위 없는 삶의 원동력이었다. (비록 거짓이었지만) 사랑하는 이에게 전하는 이메일, 세상에 남겨진 부모님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적당히' 각색한 소설. 아름이가 떠났어도 아름이가 쓴 글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아파서 울면서 속을 게워내는 나를 보며 차라리 당신이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고 슬퍼하던 엄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정성스레 고심하며 썼다 지우다를 반복하며 편지를 쓰는 나. 여러모로 공감가는 장면이 많아 더욱 애착이 가는 소설이었다. 과묵하고 표현에 서툰 내가 유일하게 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진심은 역시 글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부끄럽고 쑥쓰러운 감정의 파동이 조금은 덜 휘몰아치고, 그리고 조금 더 따뜻하니깐.

아름이가 좋아한 Antifreeze를 다시 한 번 들어보니 아름이의 글이 아른거리는구나.

우린 오래 전부터 어쩔 수 없는 거였어 우주 속을 홀로 떠돌며 많이 외로워하다가 어느 순간 태양과 달이 겹치게 될 때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하늘에선 비만 내렸어 뼈 속까지 다 젖었어 얼마 있다 비가 그쳤어 대신 눈이 내리더니 영화서도 볼 수 없던 눈보라가 불 때 너는 내가 처음 봤던 눈동자야 낯 익은 거리들이 거울처럼 반짝여도 니가 건네주는 커피 위에 살얼음이 떠도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바다 속의 모래까지 녹일 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얼어붙은 아스팔트 도시 위로 숨이 막힐 거 같이 차가웠던 공기 속에 너의 체온이 내게 스며들어 오고 있어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바다 속의 모래까지 녹일 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얼어 붙은 아스팔트 도시 위로 너와 나의 세대가 마지막이면 어떡해 또 다른 빙하기가 찾아오면 어떡해 긴 세월에 변하지 않을 그런 사랑은 없겠지만 그 사랑을 기다려줄 그런 사람을 찾는 거야. - Antifreeze / 검정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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