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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평점 :
대학 시절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나리 나리 개나리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여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
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
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
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
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
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
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
을 할까?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젊은 나이에 극장에서 쓸쓸히 객사한 아들. 청춘의 '예민함'이란 감정을 이별과 배고픔으로 생생하게 그려낸 사내.
기형도 시인의 유일한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었다. 아니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곱씹었다.
이름마저 시 같은 사나이 기형도. 한때 20대 청춘의 바이블이나 다름 없는 그의 시집은 여전히 불티나게 읽힌다.
외로움, 고독, 슬픔, 그리움, 쓸쓸함, 가난.
트라우마 혹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섬세하면서도 담담하게, 차갑고 딱딱하게. 높고 낮은 감정의 폭을 정확히 짚어내는 그의 문체는 예술 그 자체다.
그리고 교과서에서 만난 아름다운 시중 하나인 <엄마 걱정>.
''찬밥처럼 방에 담겨'란 표현이 어찌나 가슴 깊숙이 다가오던지.
동생과 땀을 뻘뻘 흘려가며 집안 청소를 하고, TV를 보며 온열매트 위에서 귤을 까먹다가도.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엄마의 발소리에 귀가 쫑긋해지던 유년 시절의 '추억'이 눈앞에 펼쳐진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활자로만 적힌 글 한줄이 내 어린 시절의 오감을 자극하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고맙고 신기했다.
짧은 시, 긴 여운.
딱 두 마디로 그의 시를 평하기에는 너무나 범접할 수 없는 쓸쓸함이 담겨 있어서 자꾸 시집에 손이 가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