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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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 (이제 다들 아셨죠. 김 박사가 누구인지? 자, 그럼 어서 빈칸을 채워주세요.)

김 박사입니다. 최소연 씨의 상황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마음 누구보다 잘 이해합니다. 한번도 만나보지 않아도 저 역시 당신에게 오랜 친구같은 느낌을 받고 있으니 말이죠. 어머님은 아마 누군가를 크게 원망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게 아버님인지, 아니면 타인일지는 밝혀내야할 문제이지만, 그 응어리가 심각하게 단단해진 상태입니다. 아버지 역시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이 내재화된 상태에서 다시 발현되신 것 같네요. 둘 사이의 문제가, 아니 어쩌면 최소연 씨를 포함한 세 사람의 문제가, 혹은 또 다른 누군가의 존재가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의 시작일 겁니다. 최소연 씨의 잘못이 아닙니다. 더 본질에 다가가십시오. 죄책감은 결국 책임을 져야할 사람이 짊어져야할 몫입니다. 욕이 나오면 하세요. 비난하고 싶으면 강하게 내뱉으세요. 그럴수록 사태는 투명해지고, 본질은 한 걸음 다가와있을 겁니다. 거의 다 왔습니다. 당신은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잃는 수밖에 없지요. 울컥 밀려오는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어머니에게 말하세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하세요. 가족이란 결국 이어지는 존재가 아닐까요? 김 박사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Q

Q : 김 박사님, 김 박사님.... 김 박사님께서 해주신 이야기 잘 들었어요. 하지만 김 박사님... 이 개새끼야, 정말 네 이야기를 하라고!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네 이야기, 어디에 배치해도 변하지 않는 네 이야기 말이야! 나에겐 지금 그게 필요하단 말이야, 김 박사, 이 개새끼야.


A : 

김 박사입니다. 아니, 당신의 탄원서를 읽은 P입니다. 아르바이트 그만두고 어디론가 숨으면 모를 거라 생각했어? 나한테 그렇게 모든 걸 뒤집어 씌우고, 내 인생을 산산조각냈는데. 나도 똑같이 만들어줄게. 아니 이미 거의 다 끝나가지만. 혓바닥으로 시작된 악연은 혓바닥으로 끝내줄게. 기다려.

 

 

 

"한데 그거 아슈? 이 차는 그래서 지금까지 굴러가게 된 거라우. 후진이 안 되니까. 원래 잡다한 기능들 때문에 제 기능들이 망가지는 법이라우. 사람들이 그걸 몰라서 그렇지."

 

-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中 

 

 나는 차를 밀면서 할머니한테 물었다.

- 할머니, 아직도 손주보다 자동차가 더 좋아?

할머니는 내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조수석 등받이에 기대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몇 번 마른기침을 하기도 했다. 그러곤 한참 후에 이런 말을 했다.

- 야, 야, 이러니까 꼭 옛날 생각난다. 옛날에 네 삼촌도 나랑 논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꼭 리어카를 이렇게 밀었거든. 끌지 않고. 꼭 뒤에서 밀었어. 이 할미 얼굴 계속 바라보면서 말이야....

나는 허리를 더 아래로 깊숙이 숙인 채, 프라이드를 밀었다.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또 생각했다. 삼촌은 이렇게 직접 민 것 또한 노트에 적어놓은 것일까, 그렇다면 그 거리는 과연 어떻게 잴 수 있는 것일까.

 

-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中

 

 

퉤. 소리와 함께 별안간 그의 눈에 차가운 이물질이 와 닿았다. 그것은 그의 눈에서부터 천천히 뺨 위로 흘러내렸다.

"어머, 어머, 얘가 왜 이래!"

"송이야, 왜 그러는 거야!"

그의 주변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발소리가 들렸고, 누군가가 소리 내어 우는 소리, 누군가가 누군가의 팔을 힘겹게 잡아끄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침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기다렸을 뿐이었다. 누군가 그의 팔짱을 끼고 뒤를 돌아 서둘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뺨 위에선 계속 비린내가, 우유 냄새가 났지만, 그는 그것을 닦아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따라가기만 했다. 나무처럼 딱딱하게.

 

- 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中

 

저는 이 글을 쓰기 위해서 1심 판견문을 읽고 읽고 또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쓸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그 안에 있는 것들, 거기에 기록된 사실들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판결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저에겐 한 가지 의문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맴돌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저는 해남까지 내려가게 된 것이지요. 바로 그 여학생이 한 말, '이 선배가 왜이렇게 자꾸 술만 따라 주실까?'라는 말. 그 말이 저를 계속 괴롭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를 괴롭힌 것은 '술' 뒤에 붙은 '만'이라는 보조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보다는 왜 이 아이는 '선배'라는 단어 앞에 '이'라는 지시관형사를 붙였을까? 그것들이 궁금했던 것이지요. 만약 그것이 제 추측이나 의심처럼 쓰인 것이 맞다면, 그러면 사건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아이에게 P가 그냥 선배가 아닌 '이' 선배로 다가왔다면, 혼자만 그렇게 생각한 날들이 많았다면, 그렇다면 그날 그때 그 아이 앞에 놓인 술잔은 또 어떻게 달라지게 되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을 확인하러 해남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또한 그 '이'가 단순한 '이'가 아닌 하나의 커다란 고유명사로 다가와, 그 안에 붙들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탄원의 문장 中

 

"언젠가 수환 학생이 이정 선생의 이름을 처음 말하면서 그게 '고무래가 되겠다'라는 뜻 아니냐고 물어왔던 적이 있소. 나는 그때 그런 뜻도 있지만 그건 그냥 글자 모양 그대로 보는 게 맞을 거라고 말해주었소. 그러니까 쇠스랑(而)과 망치(丁)가 맞을 거라고...우린 해석하기보단, 보이는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었으니까."

 

- 이정(而丁) - 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2 中

 

한참 동안 소파에 앉아 있다가, 나는 다시 느릿느릿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 좌변기에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앉아보았다. 눈 앞엔 바로 두루마리 휴지가 매달려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보다가 잠깐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다시 그것을 쳐다보았다. 나는 무언가를 참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또 계속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그것이 무서워 나는 자칫 소리 내어 울 뻔했다. 나는 팔뚝으로 입을 가린 채 계속 두루마리 휴지를 쳐다보았다. 끅끅, 소리가 났지만, 나는 그때마다 좌변기 레버를 눌렀다. 다행히...소리는 새어 나가지 않았다.

 

- 화라지송침 中

 

세월이 지나 나 또한 트렁크 팬티라는 것을 입고 살게 되었지만, 그 반바지가 트렁크 팬티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잘 분간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분간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그 반바지는 철저히 집에서만 입었다. 몇 년 전 여름에는 하도 더워서 팬티도 벗어버리고 그 반바지만 입고 지내기도 했다. 그제야 그 반바지는 내게 팬티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그날 오후, 나를 ‘씩씩‘거리게 만들어, 도시가스관을 타고 올라가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반바지일까, 팬티일까, 김 주석일까?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야기를 다 끝낸 지금까지도, 나는 그것을 잘 모르겠다. 혹시, 니코틴 때문은 아닐까?



-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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