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운 겨울 해물찜을 먹으려고 기다리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왜 꼭 고춧가루가 붙어있는 더러운 부분은 뒤늦게 보이는 걸까? 그냥 다른 컵으로 마시자 생각하고 넘어갔다. 곧바로 해물찜이 나왔지만 너무나 명백하게 머리카락이 한가닥 새우껍질에 달라 붙어 있었다. 식당 주인을 불러 음식을 바꿔달라고 당당하게 말할 용기가 없었는지, 아무도 모르게 슬쩍 머리카락을 빼냈다. 괜히 위생상태는 별로였지만 그래도 음식이 맛있었다고 자위했다. 실제론 그냥 맵기만 하고 그저그랬는데.
# 태국 여행을 가서 우버나 그랩도 잡히지 않는 후미진 골목에서 겨우 택시를 잡았다. 미터기를 켜달라고 했지만, '노미따~'를 외치며 계속 비싼 금액을 불렀다. 그냥 내리는 시늉까지 했지만, 택시 잡기가 쉽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기사는 그리 당황하지도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알고도 사기를 당하는 심정으로 택시를 탔다. 오는 내내 차도 꽉 막히고, 뒷자리를 강타하는 음악은 시끄러워 신경을 긁었다. 겨우 호텔로 돌아와 내리면서 바가지 금액을 내면서 나도 모르게 말했다. "Thank you". 고맙기는 커녕 불쾌하고 짜증났는데.
어려서부터 “착하다.”, “순하다.”, “얌전하다.”는 칭찬을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딱히 그런 칭찬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도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많은 상처를 입은 후에 아마 이렇게 느꼈을지 모른다. 본성이 착한 사람보다는 개성이 분명하고 성질부릴 줄 아는 사람이 훨씬 잘 산다고 말이다. _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니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착하다'는 수식어를 많이 들어왔다. 너그럽다, 협동심이 뛰어나다, 배려심이 깊다, 양보심이 많다. 이런 비슷한 류의 평가가 학생부에 많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창시절 남에게 욕을 해본적도 없고, 싸움에 휘말린 적도 없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서 온갖 진상을 마주하다보니 내 성격에 대해 스스로도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 단호하게 내 몫을 챙기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내 할일만 하면 되는데 어느순간 도움을 청하기 좋은 만만한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물론, 내가 그런 과정에서 뿌듯함, 성취감을 느끼면 상관없지만 제법 이기적인 나는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쌓일 뿐이었다. 그걸 애써 지나치기 위해 합리화를 하는 꼼수만 늘어날 뿐이었다. 언젠가는 복으로 돌아올 거다, 내가 위험에 처하면 도와줄거다, 이러면서 배우는 게 있다.
개뿔.
나는 그저 불편한 게 싫어서 그 상황을 피하는 겁쟁이였던 것이다.
타인을 과도하게 허용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학대다. 온화하고 선량한 것도 좋지만 필요하다면 자신을 위해 싸울 수 있는 무기인 ‘까칠함’도 갖춰야 한다. 기억하자. 강해야 할 때는 강하게, 부드러워야 할 때는 부드럽게 변할 줄 아는 사람만이 인간관계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