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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노동의 역습 - 대가 없이 당신에게 떠넘겨진 보이지 않는 일들
크레이그 램버트 지음, 이현주 옮김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물이 영어로 뭐지? Water가 아니라 Self라고 껄껄껄."
멱살을 쥐게 하는 아재개그 단골 소재인 셀프서비스는 이제 너무나 당연한 시스템이다. 돈을 내고 밥을 먹는데, 물은 스스로 떠와야한다니? 손님은 왕인데? 라고는 이제 헬조선 꼰대 선비도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이처럼 소량 셀프 계산대에 직접 바코드를 찍으면 물건을 담는 것도 언젠가는 별도의 공간이 아닌 주류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스스로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자연스레 타인이 해주던 노동을 스스로 하고 있다. 크레이그 램버트는 뉴욕 타임즈에 기고한 사설 '대가 없이 추가된 그림자 노동'을 확장해 <그림자 노동의 역습>을 내놓았다.
저자는 오스트리아 사회사상가 이반 일리치가 주장한 '그림자 노동' 개념을 현대 사회에 접목해 다양한 사례를 분석했다. 램버트는 돈을 받지 않고 회사, 조직을 위해 행하는 모든 종류의 일을 '그림자 노동'으로 정의한다. 이케아에서 북유럽 감성을 느낀다고 가구를 직접 조립하는 건 물론이고, 액티브 엑스와 더불어 디지털 사회에서 가장 짜증나는 일 중 하나인 숫자+영문+특수기호 조합 패스워드 교체도 이에 해당한다. 인터넷 항공권, 숙박 예약, 온라인 주식 거래, 인터넷 의료 지식 검색, 스팸 메일 삭제, 음료잔 반납. 너무나 많은 일들은 우리는 멀티태스킹으로 처리하고 있으며, 이는 인건비를 줄이려는 기업의 노력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인원 감축이나 기기 자동화와 함께 고객에게 제공하던 서비스를 교묘한 방법으로 스스로 처리하도록 전가하는 방법이 대중화된 것이다.
물론 그림자 노동을 통해 소비자는 당장 재화와 서비스를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고, 자신만의 기호나 특색에 맞춘 소비가 가능하다. 처리 과정에서 본인만의 경험과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지만, 21세기에 시간은 금이다. 아니 금보다 더한 가치다. 그림자 노동때문에 할 일이 늘어나고, 자율성이 늘어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자기 인생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간다. 게다가 사라지는 직업들의 대부분은 저임금 미숙련 일자리가 차지할테고, 양극화를 가속할 수도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 일상으로 스며들어, 의구심을 가지지 못했던 다양한 그림자 노동을 일깨워주는 것만으로도 신선한 책이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당연하다고만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다보면, 어느순간 불필요한 업무까지 악랄한 기업에 봉사하게 될테니. 이걸 쓰고 있는 와중에도 익스플로어 보안 프로그램 설치를 권하는 창이 뜬다. 그림자노동으로부터 제발 해방되고 싶다.
"삶은 더 바빠졌다. 하루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24시간인데, 어쩐 일인지 시간이 줄어든 것 같다. 사실 시간이 줄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여유 시간'이 줄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번창한 시대에 살고 있고, 이 번영이 한가로운 시간을 안겨 줄 게 분명한데 말이다. 하지만 조수가 해안을 침식하듯 새로운 일들이 조용히 우리의 시간에 침투하여 여가를 조금씩 빼앗아 가고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우리는 자원하지도 않은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느라 매일 허우적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일들은 우리가 깨닫지도 못한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밀물처럼 밀려오는 그림자 노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