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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세계를 스칠 때 - 정바비 산문집
정바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가을방학 1집은 내 인생의 명반으로 꼽을 정도로 정말 많이 들었다. 마음속에 콕 박혀 오랜시간 은은하게 맴도는 정바비의 가사와 멜로디, '만약'이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마음을 흔드는 계피의 보컬. 자연스레 언니네 이발관, 브로콜리 너마저 등 이들이 속한 인디밴드의 노래들도 자연스레 즐겨들었다. 아껴듣는 노래를 굳이 꼽자면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너무 좋으면 혹시나 질리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마음이랄까? 풋풋했던 대학 시절의 추억, 그때의 감정, 그곳의 분위기를 신기하게도, 어렴풋이 기억나게 하는 노래다. 대학시절을 가득채운 추억의 공통분모를 떠올리면 정바비의 감성이 제법 많이 남아있었다. 정신없이 회사를 다니며 CDP가 아니라 출퇴근길에 유튜브 영상이나 깔짝거리며 보다보니 가을방학을 잊고 지냈다. 그러던 와중에 자연스레 정바비 산문집 <너의 세계를 스칠 때>을 회사 도서관에서 우연찮게 보고 반가운 마음에 덜컥 빌렸다. 내가 상상한 정바비는 수줍은 안경잡이 소년이었다. 아마 콘서트때도 그리 말이 많지 않고, 묵묵히 기타를 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정바비에 대한 환상은 100% 깨졌다.
매우 시니컬하고 까칠하며, 호불호가 너무 확실한 사람이었다. 여자를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며 잔잔한 노래보다는 록을 좋아하고 본능에 충실한 노래가 어울리는 싱어송라이터였다. 그런 그가 줄리아하트 활동을 할 때가 오히려 가을방학 때보다 편한 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철저히 자연인과 가면을 쓴 뮤지션의 경계가 확실한 것 같더라. 에세이를 읽으면 흔히 엿볼 수 있는 은근한 교훈, 삶의 지혜 혹은 유명인의 에피소드는 아예 없어서 색다른 느낌이었다. 오롯이 자기의 취향을 속속들이 공개하며 이야기를 늘어놓는 스타일이었다. 맨 마지막 페이지에 나온 참고도서, 음악, 영화를 비교해보니 내가 본 건 딱 2개였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라이프 오브 파이>. 그처럼 일본소설에는 전혀 흥미가 없고, 대부분의 노래도 아예 처음 듣는 제목인 게 많았다. 하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그에게서는 자신의 취향에 대한 우월감이나, 강요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자유로운 영혼의 대명사 뮤지션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가를 엿보고, 추억의 노래들을 다시 한번 들어본 것만으로도 제법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나도 눈치보지 않고 자유롭게 취향대로 살고싶단 막연한 상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