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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토끼가 떨어진 날
서동원 지음 / 한끼 / 2025년 6월
평점 :

만약 감정에 형태가 있다면 당신의 감정은 어떤 모습일까? 나라면 바다 깊이 가라앉은 난파선과 그 안에 놓인 낡은 나무 상자를 떠올릴 것 같다. 표면에는 물이끼가 무성하고 단단한 산호초가 뿌리를 내린 그런 상자의 모습 말이다.
서동원 작가의 『눈물토끼가 떨어진 날』은 열일곱 살 소녀 한유리와 눈물토끼 무토가 각자의 상처를 마주하는 법을 배워가는 성장담이다. 이야기는 ‘눈물 유출’이라는 낯선 혐의로 재판장에 선 눈물토끼 무토의 모습에서 막을 올린다. 눈물토끼 종족에게 눈물을 만드는 일은 신성하고 자랑스러운 사명이다.
“눈물은 단순한 물방울이 아닌 감정의 흐름이며 우리가 눈물을 만들고 사람들이 눈물로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생명의 순환과도 같다.” (14p)
눈물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무토는 아무리 외쳐도 변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자포자기한 상태다. 그는 수많은 감정이 태어나고 자라는 눈물이 정작 주인에게 닿지 못한 채 폐기되는 현실에 깊은 회의감을 느낀다. 심지어 헛된 욕심으로 더 많은 눈물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의 가치를 근본부터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태 간절하게 생각했던 것들은, 믿었던 것들은 정말 가치가 있던 걸까?”(15p)
무토가 던진 질문의 답은 한유리라는 소녀에게 있다. 작품은 무토라는 커다란 원이 한유리라는 또 다른 원을 품는 동심원의 구조로 전개된다. 유실된 눈물을 찾기 위해 인간 세상에 만들어 놓은 수족관에서 마주치게 된 한유리가 바로 그 중심이다. 함께 눈물을 찾아 나서는 두 존재의 그 이후 이야기는, 부디 직접 책을 통해 확인하길 바란다. 이 책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외면했던 자신과 마주할 용기를 불어넣는 성장 서사’라 할 수 있다.
눈물토끼라는 독특한 설정을 가진 무토와 감정을 억누른 채 살아가는 한유리의 성장을 기대하며 책을 펼쳤고 그 기대는 온전히 충족되고도 남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문장이다. 눈물토끼가 사는 세계를 닮은 알록달록하고 몽글몽글한 문장들은 익숙했던 감각마저 새롭게 일깨우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 문장이 가진 아름다움 그 자체가 이 책의 커다란 매력이자 장점이다. 특히 마지막 한유리가 무토를 돕는 장면들은 내 세상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며, 그 안에는 수많은 ‘너’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게 한다.
사람들은 감정에 좋고 나쁨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댄다. 좋고 나쁨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책 속 한유리의 생각처럼, 타인에게 드러내도 약점이 되지 않는 감정, 약해 보이지 않는 밝고 기쁜 감정만이 ‘좋은 감정’이고 나머지는 모두 ‘나쁜 감정’으로 치부되어야 할까.
감정을 밖으로 꺼내 보인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과 같다. 그리고 스스로를 마주하는 일만큼 힘든 일도 드물다. 세상에 완전무결한 것은 없기에 모든 존재에게는 흠집과 상흔이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그 상흔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것이라면, 그 흠집은 유독 더 크고 아프게만 보일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딛고 스스로를 마주하는 일은 하나의 세계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과 같다. 만약 그 세계가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다면 더욱 그렇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더욱 단단하고 거대해진 세계와 마주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분명 우리가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내가 발 딛고 선 곳이 어디인지 보지 못한다면, 내 발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또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눈물이 많은 편이지만 그것이 내 감정에 언제나 솔직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 또한 내 안의 보기 싫고 힘든 부분들을 애써 외면하며 ‘괜찮은 척’ 살아간다. 스스로를 속이는 일은 생각보다 쉬워서 우리는 곧잘 그것을 진실이라 믿으며 살곤 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만 한다. 모두가 이 사실을 알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이 책은 그런 우리를 다그치거나 재촉하지 않는다. 오후와 저녁의 사이에서 나긋하게 말하는 음유시인처럼, 그저 곁에 앉아 다정히 이야기를 풀어낼 뿐이다. 그럼과 동시에 괜찮다고, 너 자신을 온전히 바라봐도 된다고, 조용히 기다려준다. 마주 봄의 물꼬를 터주려는 이 사랑스러운 움직임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나를 마주 볼 순간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스스로를 직면하다 설령 나의 일부를 잃더라도 나의 세계는 계속 흘러갈 것이고 나는, 분명 괜찮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주 조금 아쉬웠던 점을 꼽자면, 무토라는 매력적인 캐릭터의 서사가 조금 더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 정도다. 물론 이 자체로도 이야기는 충분히 완벽하다. 다만 내가 무토라는 인물에 그만큼 깊이 빠져들어,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엿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눈물에는 많은 감정이 산다고 했던가. 그 의미를 알 거 같았다.”(261p)
현실의 감각과 판타지의 상상력이 더없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작품이다. 눈물이 날 것 같을 때마다 애써 고개를 들거나 입술을 깨무는 습관을 지닌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그리고 한때 열일곱의 시절을 지나온 모든 어른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감정의 형태가 있다면, 당신의 수조 속 감정은 이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책을 덮고, 당신만의 감정의 형태를 가만히 상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해당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으며, 저의 솔직한 감상을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