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찾은 자유 - 천년 지혜의 보고 장자에서 배우는 삶의 자세
뤄룽즈 지음, 정유희 옮김 / 생각정거장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장자(莊子)의 원작자는 장주(莊周).장주(장자)의 신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史記<老莊申韓列傳노장신한열전>에 따르면 그는 전국시대 나라 사람이다. 양나라 惠王(B.C370319재위), 제나라 宣王(B.C319301재위)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 또한 옻나무 밭을 관리하는 벼슬을 맡기도 했다. 초나라 威王(B.C339329재위)이 그를 재상으로 초빙했지만 장자는 나는 차라리 자유롭게 살겠다!”라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위 내용은 장자에 관해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전기다. 이 전기는 장자가 죽고 약 200여 년이 지난 뒤 역사학자 司馬遷(사마천)이 기록한 것이다. 아쉽게도 기록된 내용은 대단히 간략하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장자의 부모와 자녀가 누구인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사기<宋世家송세가>戰國策전국책에서도 장자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수 없다. 장자 본인이 했던 말을 통해 우리는 그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인은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헐렁한 무명옷을 입었는데 곳곳에 기운 자국이 가득했다고 한다. 허리에는 풀로 엮은 띠를 두르고 발에는 삼끈으로 엮은 신을 신었는데 뒤축이 떨어져 나갔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장자에게 유일한 말동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언변에 능한 惠施(혜시,전국시대 송나라의 철학자이며 헤자라고도 함). 혜시는 公孫龍(공손룡,전국시대 사상가)과 마찬가지로 닭은 다리가 셋이다’, ‘알 속에 털이 있다와 같은 명제에 관해 논쟁하기를 좋아했다. 혜시 또한 장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혜시가 죽고 난 뒤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와 함께 이야기 할 사람이 없구나!”이외에 장자와 가까이 지낸 사람으로는 그의 제자 몇 명이 전부다. 그들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장자는 무척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생을 사는 동안 자신을 알아주는 지음지기 한 명 없었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대자연의 化身(화신)들이다. 구만 리 창공을 나는 붕새, 바람과 이슬을 먹고 사는 고야산의 신녀, 하늘의 피리를 연주하는 남곽자기, 그리고 그와 꿈속에서 조우했던 나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장자는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잔혹하게 정복했던 전국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우리는 장자곳곳에 반영된 당시의 참상을 읽을수 있다. 장자 칙양편을 보면 제나라로 간 백구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나라 교외에 막 도착했을 때 백구가 처음 발견한 것은 죄수의 시체였다. 백구는 죄수 곁으로 가서 그를 일으켜 앉히고 자신의 옷을 그에게 덮어주며 통곡하면서 말했다.“아아! 천하의 가장 큰 재앙을 그대가 먼저 당하였구려! 가엾어라! 국법에 이르기를 강도가 되지 말고 살인을 저지르지 말라고 하였다. 허나 누가 강도인가? 누가 살인을 저지르는가?강도와 살인은 누구의 탓인가?”

장자가 태어난 곳은 송나라이다. 송나라는 지금의 허난성 뤄양 부근에 자리한 소국이며 주변국으로부터 자주 공격을 받았다. 송나라는 패망한 ()나라의 후손이 모여 산 곳이었기 때문에 피정복자의 비참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장자 시대에 이르러 한때 큰 용맹을 떨쳤던 정복자인 주나라마저도 그 힘을 잃어 간신히 뤄양 성을 지키고 있었다. 현실의 고통은 끝이 없는 나락과 같다. 지금은 석양 아래 놓인 옛 정복자의 위용, 황토 언덕 아래의 현자, 이를 두고 위대하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보잘 것 없다고 할 것인가? 장자는 여기서 눈길을 돌려 인간 세상을 주목했다. 그가 바라본 것은 바로 다함이 없는 時空(시공)이었다.

장자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결국 不自由임을 간파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부자유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 의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질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감정에 의존하며 지식에 의존하고 예술에 의존하며 신에게 의존해서 살아간다. 이렇게 의존하다 보면 인간은 자신이 판부자유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인간이 자유를 얻으려면 반드시 의존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장자는 인간은 반드시 자신의 존재가 무한한 시공 속에서 일어나는 대자연의 유기적인 운행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반드시 자연의 관점에서 一切를 관찰해야 한다. 자연은 마치 混沌 상태와 같으므로 인간 또한 혼돈 상태와 같아져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타인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이라고 그려내서는 안 되며 자연을 인간으로 그려서는 안 된다. 가치 없는 것을 가지 있는 것으로 그려서는 안되고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그려서는 안 된다. 죽음을 생명으로 그려서는 안 되고 무한을 유한으로 그려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장자 철학이 제자백가의 사상과 다른 점이다.

장자의 철학은 자유의 철학이다. 무한한 시간, 공간 속에서 생명을 마음껏 향유하는 철학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분석이라는 이름으로 멀쩡하게 살아있는 나무를 무참하게 베어버린다. 하지만 장자는 이 살아있는 나무가 자신의 생명을 마음껏 향유하게 한다. 장자의 구조와 차원을 볼 때, 장자는 너무나 위대한 철학자다. 인간 세상은 그에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장자가 묘사한 붕을 비웃는 참새 小麻雀自鳴得意(소마작자명득의)참새가 구만 리 하늘 꼭대기를 날아가는 붕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붕새 저 녀석은 구만 리나 되는 높은 곳까지 힘들게 날아갈 게 뭐람? 나는 땅에 있다 날고 싶으면 여기저기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다고! 어떤 때는 저 높은 느릅나무까지 날아오르기도 하고, 나무 위까지 오르지 못하면 그때는 다시 땅으로 내려오면 그만이지. 이렇게 풀밭과 숲속을 마음대로 누비고 다니는 것도 대단한 재주라고!“참새의 재주,지식,경지는 모두 붕과는 다르다. 참새는 자신의 경지로는 결코 붕을 이해할 수 없기에 그를 비웃는 것이다. 사람은 각기 지닌 것이 다르다. 그러니 우리도 참새를 비웃을 필요가 없고, 붕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붕이 저 멀리 구만 리의 상공까지 날아오르자 참새가 이 광경을 보고 붕을 비웃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이 장자를 오해하고 비방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세상 사람들은 장자의 철학을 소극적이며 염세적이고 퇴페적이고 허무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실제로 삶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은 누구인가? 또한 세상은 장자의 사상을 개인주의, 신비주의, 무정부주의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장자의 지혜는 이러한 주의들을 까마득히 높이 뛰어넘었다. 이러한 주의들은 장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어떤 지식도 지극한 도에 견줄 수 없듯이 말이다. 세상에서의 삶은 장자의 관점에서 생명이 없는 질서이다. 그런데 장자가 추구하는 것은 생명이 있는 무질서이다.

사람들은 나무의 생김새와 색깔을 좋아한다. 장자가 좋아하는 것은 나무의 생명이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유롭게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다. 장자 철학의 핵심은 인간을 극한으로 내몰아서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얻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