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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사람과 역사를 기록하다 - 초상화에 감춰진 옛 이야기
배한철 지음 / 생각정거장 / 201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사진 한 장은 열 마디 말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사진이
없었던 과거에는 초상화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초상화는
텍스트 위주의 우리 역사를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초상화
속에는 무수한 이야깃 거리가 존재한다.
시중에
초상화를 다룬 서적이 일부 발간돼 있지만 제작 기법이나 복식 등에 치중돼 있으며 초상화 속 인물의 삶을 다루고 초상화가 남아있지 않는 위인들이
실제 용모를 추적해 보려는 시도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문헌,
신도비
등 현전하는 유물에서의 인물 묘사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조선은
‘초상화의
나라’라고
할 만큼 무수한 초상화가 제작됐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생전에 공신으로 봉해졌을 때 이를 기념해 제작했지만 많은 경우 해당 인물이 사망한 후 그를 추모하기 위해 그렸다.
임금은
공신들을 위한 논공행상의 하나로 자신의 초상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어진화사에게 초상화를 그리도록 명해 하사했다.
공신에게는
벼슬과 토지,
노비
등도 내려지지만 초상화를 하사 받는 것을 가장 명예롭게 여겼다.
조선은
중국의 일호불사 편시타인(一毫不似
便時他人 터럭
한 올이라도 같지 않다면 곧 다른 사람이다)의
화풍을 계승해 초상화를 그리는데 있어 ‘극사실주의’를
추구했다.
후손들은
조상의 영정을 실제 조상과 동일시하면서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이런
이유로 무수한 전란을 거치면서도 다행스럽게 많은 수의 초상화가 보존될 수 있었다.
상당수의
초상화가 공개됐지만 여전히 가문별 비공개로 보관 되고 있는 것이 적잖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태조 왕건의 사당에 남아있는
영정이 왜 용의 형상처럼 길쭉한 것인지 그리고 왕건릉에서 발견된 그의 아들이 제작한 왕건 청동상의 얼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지를 비교하는
과정도 흥미롭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로 명성을 떨친 강세황 가문은 그를 포함해 3대가
오늘날 대한민국 학술원에 해당하는 조선 최고영예의 ‘기로소’에
들어가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로
부러움을 샀다.
강세황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손자의 초상화를 비교하면서 강세황 가문의 뒷얘기와 기로소의 의미를 짚어보는 것도 의미가 크다.
지금 초상화가 확인되지 않는
인물들의 실제 얼굴은 어땠을까 추적하는 것은 새로운 시도이다.
영정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퇴계 이황의 경우 그의 학문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성리학의 뿌리가 됐다.
퇴계학풍을
계승한 일제강점기 사람인 구도 다께조가 소장한 퇴계 초상화는 특이하게도 사무라이풍이다.
다행이
퇴계의 작은 아버지이면서 스승이기도 한 이우 초상화가 잘 남아있어 퇴계의 용무를 추측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성웅으로 추앙받지만 마찬가지로
영정이 사라진 충무공 이순신의 용모도 비슷한 방법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행방이
묘연한 초상화 찾기에 골몰하는 대신 문헌을 뒤져보니 충무공의 얼굴을 묘사한 기록이 일부 발견되는데 놀랍게도 일본 덴리대학이 갖고 있는 충무공의
고손자인 이봉상의 인상과 매우 흡사하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은 그동안
초상화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회도서관에서 그의 초상화가 나왔다.
1726년
출간된 <조선명현초상화사진첩>의
맨 첫 장에 김유신초상화가 실려 있다.
필자는 기술적인 방면에 치중하는
전문서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
책은 공개된 초상화,
그리고
공개되지 않았던 초상화를 총망라 하며 위인들의 실제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다양한 증거들을 제시한다.
또한
초상화의 주인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일반인들의
초상화에 대한 인식과 관심을 높이고 더 나아가 새롭게 밝혀낸 역사적 인물의 모습을 표준영정 제작 등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게 필자의 저작
의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