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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고 되새기는 고전 국가 ㅣ 클래식 브라운 시리즈 3
김혜경 지음, 플라톤 원저 / 생각정거장 / 2016년 6월
평점 :
---쉽게 읽고 되새기는 고전---
플라톤은 자기 작품에 자신을 등장시키지 않고 거의 매번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켜 대화를 이어가는 프롤로그를 정교하게 설치하기도 하며 여러 극적 장치들을 공들여 설정하기도 했고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논의를 스스로가 구축한 겹겹의 틀 안에 자리 잡게 했다. 고도의 극적 구조를 지닌 다른 작품들에 비한다면 <국가>는 플라톤의 대표작이자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꼼꼼한 무대 설치나 특별한 서막도 없이 불쑥 본극의 막을 올려 버린 것처럼 시작한다. 작품속 인물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고 이에 응답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 물음이 국가의 면면을 관통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중요한 물음이다. 국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호흡 깊은 성찰이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그리고 그 근거는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그런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야말로 우리가 온 생애를 걸고서라도 모색하고 대답해야 할 깊은 물음이라는 점을 <국가>는 보여준다. 역사상 플라톤 철학에 대한 반감과 반론은 그에 대한 존중과 후속 연구의 깊이 못지않게 강력하고 때로는 끈질기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플라톤 연구자들이 논란을 벌이곤 하는 문제들과 씨름할 이유는 없다. 플라톤의 <국가>가 정치철학 분야의 최고 고전이라고 주장하든 플라톤을 ‘이데아’라는 키워드로 표상되는 관념론자라고 부르든 또는 전체주의자나 엘리트주의자 등등의 푯말을 앞세우며 플라톤의 그런 면모가 <국가>에서 가장 전형적이고도 종합적으로 드러난다고 확언하든 간에 우리가 주의 깊게 살피고 음미해야 할 점이 있다. 즉 플라톤이라는 철학자와 그의 <국가>에 쏟아지는 모든 선언과 갖가지 평가들을 거론하기 전에 주목해야 할 것은 소크라테스의 내러티브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과 함께 시작된 진지한 탐구 여정에 대한 시사라는 점이다. 소크라테스가 황혼기 인생의 실상을 물으며 시작하는 대화는 성격의 문제, 재산 소유의 이로움, 삶의 방식 등으로 옮겨 간다. 누구의 삶이 어떠한가, 즉 살 만한 것인가 그렇지 못한가라는 문제는 나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방식의 삶을 살고 있는지가 핵심이라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화 속 인물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물음과 정의의 탐구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국가>가 정의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임은 틀림없고 또 이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왜 정의를 요청하는가? 정의는 추상적인 이론의 공간에서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다. 플라톤 역시 정의의 문제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토의하는 과정에서 함께 논의해야 할 문제임을 분명히 한다. 정의는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현실로 다가오는 물음이고 또한 성공적인 실천을 고민하는 활력과 난관을 동시에 얻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해 정의를 탐구하기 때문에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을 살펴보지 않고는 정의를 제대로 연구할 수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현실적인 물음이면서 동시에 뿌리를 이루는 물음이다. <국가>가 제기하는 물음들의 이런 근원적 연결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체제를 들춰 보라! 권력을 가진자들, 지배 세력은 언제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법과 제도 그 모든 것들을 만들었고 또 이용했을 뿐이다.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늘리기 위해 수립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법, 제도 등에다 ‘정의’라는 그럴듯한 포장을 씌워 놓고 힘없는 보통 사람들을 때로는 현혹하고 때로는 압박해 왔다. 사람들이 정의를 칭찬하고 부정의를 비난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는 정의가 덕이고 부정의가 악덕이어서가 아니다. 부정의를 행하지 않기 위해서도 아니다. 철저하게 부정의한 자들, 말하자면 대놓고 큰 부정의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오히려 어마어마한 이익을 얻고 정의롭다는 평판까지 누려 왔다. 부정의를 행할 능력이 없는 약한 자들이나 행여 남들에게 부정의를 당할까 두려워하면서 부정의를 비난하고 정의를 칭찬하는 것일 뿐이다. 트라쉬마코스의 웅변은 냉혹한 경쟁 세계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인 우리에게도 얼마나 현실적이며 큰 호소력을 지녔는가! 당신들이 덕이라고 훌륭함이라고 또 유익한 것이라고 애써 강조하려는 정의란 기껏해야 남 좋은 일이고 약자들의 무덤이라는 도전장을 소크라테스에게 던지는 것이다. 부정의가 오히려 능력이라는 만만찮은 주장과 맞닥뜨렸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애초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정의가 덕이며 능력임을 입증해야한다.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에게 대답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소크라테스의 내러티브 그 의미를 정리해 보자. 하룻밤의 열띤 논의를 다시 들려주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내가 그 대화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대화하고 논쟁했다면 탐구의 갈피마다 내가 그들에게 보내는 응답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라. 이 방법이야말로 대화로 철학을 했던 플라톤에게 다가가는 아주 좋은 길이다. 소크라테스의 네러티브를 듣는 사람,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대화해야 하는 사람은 우리들 자신이다. 플라톤이 어제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복기(복기)하고 있는 소크라테스만을 <국가>에 등장시킨 것은 그의 작품을 접할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 네러티브의 단순한 청자일 수 없음을 역설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은 하루 동안의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온 생애를 걸고 탐구해 가야 할 것, 일생의 물음임을 주장하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 인간은 정말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어떻게 꾸미고 운영해 갈지 그 원칙에 대한 탐구에서 결코 물러서지 말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왜 대화인가? 이제 이것은 우리의 정말 큰 여행이기 때문아닌가? (2016,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