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이름 정하기
이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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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많이 하다보면 몇 가지 요령이 생긴다. 제목은 그 책의 장르를 예측할 수 있으며, 목차를 읽으면 대략적인 전개가 예상된다고나 할까? 여기, 아무것도 예측되지 않고 예상 불가능한 책(모음집)이 있다. 이랑 작가의 <오리 이름 정하기>이다. 저자 이랑은 페미니즘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실상 그녀의 활동 영역은 다양하다. 영화감독, 음악가, 에세이스트, 페미니스트, 만화가까지. 이런 그녀가 이번에는 극본부터 스탠딩 대본, 단편소설까지, 소재와 장르도 다른 각각의 이야기를 한권에 담아냈다. 읽다보면 ‘괴상한 모음집’이란 표현이 딱 어울릴만한 가지각색의 이야기가 특이한 삽화와 함께 실려 있는데, 서점의 장르분류를 무색하게 만들 내용과 형식이 파괴된 개성있는 이야기들이 모아져 있다. 오컬트였다가 블랙코미디였다가 사회파였다가 페미니즘이였다가 읽다보면 그녀의 직업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들이 예측불가능으로 쏟아진다.



예수: 저기...

사탄: 예?

예수: 제가 죽여드릴까요?

사탄: 무슨 말씀이세요?

예수: 아버지요. 제가 죽여드릴까요?

사탄; 네? 왜요?

예수: 너무 심하시잖아요.

... 아버지 없이도 창조할 수 있잖아요. 어차피 지금도 저희가 다 하고 있잖아요.

사탄: 그건 그렇죠. 주님은 가끔 저렇게 엉뚱한 거나 던져주시고...

뒤뚱거리며 걷는 오리의 뒷보습을 쳐다보다 지친 듯 바닥에 털썩주저앉는 사탄.

예수도 사탄 옆에 슬쩍따라 않는다.

- 극본, 스탠딩 대본, 단편소설까지 내용과 형식이 파괴된 12편의 이야기

작가의 직업과 정신세계가 궁금해지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책은?

이 책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랑작가의 단편집으로, 소재,내용,장르,형식 등이 다양한 12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오컬트적이고 판타지적인 삽화와 함께 수록된 이야기는 종교적, 성적, 사회적, 미스터리, 블랙코미디 등 까지 다양한 분위기와 주제를 가지고 진행되는데, 저자만의 독특한 정신세계와 신랄한 비판적 사고가 담겨있다.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세상에서 살아야만 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인 [하나,둘,셋], 천지창조 프로젝트 중 상사인 ‘신’의 타박을 견디다 못해 살인공모를 벌이는 예수와 사탄이야기인 [오리 이름 정하기], 어설픈 좀비 분장 덕에 ‘똥손좀비’라는 별명으로 스타덤에 오른 보조출연자이야기인 [똥손 좀비], 인터넷으로 주분한 콘돔 박스가 잘못 배달되어 골치 아픈 여자의 이야기인 [이따 오세요], 건강한 여자의 섹스를 주제로한 여성 친화적 영화 제작자에게 일침을 가하는 딜도를 애정하는 여성 작가의 이야기인 [섹스와 코미디], ‘중성’인 성소수자로 남성들과 친하게 지내고자 했지만 직업여성처럼 성관계를 맺게된 여성 이야기인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등이 있다.

- 이제 까지 볼 수 없었던, 개성과 침범의 이야기들.

B급 코드의 ‘아류’의 등장인가? A급 코드의 ‘신(新)일류’의 등장인가?

앞서 말했듯이 특정한 장르나 형식없이 저자의 생각들을 신선하고도 마구잡이식으로 실린 이야기집이다. 특징이 있다면, 사회적 인식 때문에 다소 언급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대담하고 시원하게 풀어낸다. 예를 들면 딜도를 애장하는 여성 캐릭터나 성소수자에 속한 중성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독자에게 정설이나 상식을 엉뚱한 상상력으로 침범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천지창조를 신성시 하기보단, 현대사회의 회사생활로 그려내며, 괴팍하고 상스러운 하나님(상사)에게 겉으로는 아부하는 음험하고 계획적인 예수가 성실하고 나약한 사탄을 꼬득여 신을 살해하고자 하는 전개로 종교적 정설을 뒤집기도 한다. 그렇다고 뜻이 없는 건 아니다. 사회적 '을'에 위치한 보조출연자의 이야기로 한국현대사회의 올바른 직업의식(혹은 직업가치관은 무엇인가 고민하게 만들며, 사회 문제인 갑질문화와 악플문화 거짓미디어에 대해 논하며, 부당한 편취와 약탈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담기도 한다.


다른 B급 코드의 ‘아류’의 등장으로 봐야할지, A급 코드의 ‘신(新)일류’의 등장으로 봐야할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과 가치관에 따라 갈릴, 매우 케바케 작품이다. 누군가는 이 책을 사고 시간과 돈이 아깝다며 화를 낼수도 있고, 누군가는 이 책을 다 읽고 나름의 여운과 깊은 사색에 빠질 수도 있다. 분명, 재미있는 부분도 있고, 없는 부분도 있고, 뜻하고자 하는 부분 있고, 없기도 하다. 파격적이라고 칭찬할지, 수준이하라 폄하할지 양극단으로 평가가 갈릴만한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권하고 싶은 데, 권하기 애매한 소설이랄까? 하지만,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이야기를 읽고 싶거나, 책태기를 겪고 있는 다독가들에게 권하고 싶다. 한국단편소설이라 분류되지만, 소설부터 대본까지 자유로운 형식을 넘나들며, 보편적인 상식을 파괴하는 스토리와 감히 언급하기 어려운 종교적, 성적 소재를 별나거나 과감하게 그려내는 작품이니까.


+@ 개성파 소설을 원한다면, 성적,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사고에 대해 개방적이라면 추천.

대중적인 소설을 원한다면, 종교적인 신념이 투철하다면 비추천한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흥미롭고 재밌으나, 철학적 사회적 사고가 숨겨져있다. 이야기들의 완성도는 좀 떨어지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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