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나무 작업실
소윤경 지음 / 사계절 / 202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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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해, 강원도 속초에서 소윤경 작가님을 뵌 적이 있다. '사람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이라는 주제의 교사독서연수에 콤비Combi를 주제도서로 선정하고, 작가님을 초대했었다. 작가님은 자유롭고 소탈하고 꾸밈없는, 그렇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호두나무 작업실을 읽으면서, 일 년 전 나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멋진 척 하지 않는 글, 솔직하고 명랑하고 엉뚱하면서도 진지한 글이 딱 소윤경 작가님이었다.

 

나는 소윤경 작가의 그림책을 좋아한다. 그림책 콤비Combi는 우리는 모두 외로운 존재지만, 영혼의 '콤비'는 늘 있었고, 지금도 있지 않냐는 눈물겨운 자각을 일깨운다. 그 단짝이 책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레스토랑 Sal은 고기가 음식이기 이전에 생명이었다는 문제의식을 던지는 작품이다. 호텔 파라다이스는 여행에 대한 발랄하고 자유로운 상상에 불을 확붙이는, 당장 떠나고 싶어지는 작품이다. 이 그림책들은 무엇보다도 빤한 교훈으로 흐르지 않아서, 가르치려 들지 않아서 좋다. 부모나 기성세대가 원하고 좋아하는 그렇고 그런 내용이 아니어서 더 좋다. 그러니까 어떤 부류의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 만족을 염두에 두고 그려지지 않은 작품들이라는 느낌이다. 심지어 레스토랑 Sal이 출간된 후, 출판사는 이런 항의 전화를 빈번하게 받았다고 한다. “아이들 고기 못 먹게 하려고 만든 책인가요?”

 

호두나무 작업실을 읽어보니, 그렇게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밀어붙일 수 있는 ''의 근원을 알 것 같다. 소윤경 작가는 "세상에서 ''이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그녀는, 세상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시류에 맞춰가며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기보다, 더 강렬한 열망을 지녔다. 그 열망은, ‘다른 것이 아닌 ''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이제는 내 안의 해와 별을 따라 길을 걸어간다. 불안도 외로움도 훌훌 털어버린다. 중요한 건 세상의 인정도 보상도 아니다. 꽃들을 보며 감탄하는 것, 먼 곳에서 불어온 바람에 가슴이 설레는 것, 다시 힘을 내며 산을 올라보는 것, 산마루에서 먼 풍경들을 바라보며 땀을 식히는 것, 마주치는 생명들과 다정스레 미소 짓는 것매일 붓끝을 따라가는 하루하루다."(p219)

 

2.

나는 출근하지 않는 일년을 보내고 있다. 3월 한 달 정도는 출근하지 않는 삶이 어색했다. 누군가가 휴직 기간에 계획이 뭐에요?”라고 물으면 얼굴이 살짝 후끈해졌다. 무계획과 무대책으로 살아온 내가, 계획 같은 걸 가지고 휴직할 리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뭔가 계획이 있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조금 시달렸다. 어울리지 않게, 날마다 헛되지 않은 하루를 보내려고, 나도 모르게 애를 썼다.

 

독서교육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뭘 정리하고 쓰거나 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면, 자책했다. , 이러려고 휴직한 거야? 이러면서 말이다. 한 번은 뭘 바삐하다보니, 하루종일 씻지도 않았는데 해가 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얼른 머리를 감고 화장을 하고 예쁜 치마를 꺼내입고 집을 나섰다. 밖에 나갔더니, 타인들의 퇴근시간이었다. 다들 퇴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출근할 곳 없는 출근을 하는 모양새였다. 결국 퇴근하는 친구와 만나서 놀았지만, 오래도록 날마다 치렀던 출근 의식을 버리지 못한 가 창피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사건이었다. 요즘도 멍청하게 앉아있다가 혼자 이런 말을 종종 하고는 한다.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50일이나 가버렸네.

 

호두나무 작업실을 읽고, 나의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자신이 파둔 굴속에 처박혀 세월을 보낸다. 굴 밖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굴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쳐 간다. 하지만 그 굴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재미난 공상에 빠져 시간을 보낸다는 건 은밀한 축복이다.” (p210)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의 1년이 동굴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세상 사람들이 어디에 위치한 지도 모르는 굴 속에서, 1년을 외롭고 재미나게 보낼 수 있다. 그야말로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축복이다. 인생의 길에서, 이런 동굴의 시간은 드물게 오는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굴의 시간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 오히려 세상에 뻐길만큼 귀한 시간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수긍했다. 고요를 즐겨야 하리.

 

3.

책을 읽다보면 작가의 기질이 전해져 온다. 그 기질이 나와 전혀 다를 때에는, 대단하네. 그렇구나. 라는 형식적인 감탄과 긍정에서 그친다. 주도면밀하고, 거대한 열정을 지녔는데, 그 열정을 지칠 줄 모르고 쏟아내는 지은이를 만나면, 나는 끝모를 거리감을 느낀다. 나라는 사람은 한참 잘못 살고 있는 것 같다. 그야말로 나와는 다른 부류의 인간을 마주하는, 서늘한 기분이다.

 

소윤경 작가는 내 안의 기질과 교집합에 해당하는 면을 아주 조금 가지고 있었다. 사람은 이럴 때 상대방에게 끌리는 것 같다. 알 수 없는 즉흥적인 용기에 힘입어 전원주택을 구입한 것. 여러 사람과 만나고 오면 내가 했던 말을 며칠씩 곱씹으며 찜찜해 하는 것. 격식 차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영악한 계획을 가지고 일러스트레이터를 해 온 것이 아니라, ‘마음 한구석이 무너진 채 출판미술가로(p218)' 걸어오다가, 각기 다른 길들이 어느새 드넓은 들판 길로 이어지(p219)‘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우연을 애틋하게 여기는 것. 이런 면들 때문에 이 책의 말들이 타인의 이야기로 여겨지지 않았다.

 

에세이를 읽고 소윤경 작가를 응원하는 마음이 커졌다. 주류主流에 들어가는 것보다, 세간世間의 인정을 받는 것보다, 더 더 중요한 일이 있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가 되는 일에 골몰하고자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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