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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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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평생 ‘남의 집’을 지었다. 5년제 건축공학과를 전공했고, 한때는 꿈도 많았을 아버지가 마냥 희망만을 좇기에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일은 ‘건축’이라는 큰 틀에서 크게 멀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프리랜서로 설계 일을 하며 우리 남매는 집에 굴러다니는 커다란 건축 설계 도면에 익숙했고, 집안엔 늘 공학용 계산기가 두세 개쯤 있었다. 그뿐일까. 아버지는 현장에서 철근이 단단히 메꾸어지는지를 확인하고 철제 구조물 위에 올라가 인부들을 감독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렸다. 그러니 다시 말해서 아버지는 현장과 사무실의 사이에서 때로는 설계자로, 때로는 목수에 가까운 직책으로 일했던 것이다.

사실 아버지는 전형적인 현장 노동자에 가까웠다. 사람들이 극찬할 만한 예쁜 건물을 생각해낼 여력도 없다. 단 한번도, 아버지는 당신이 건축가라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건축가의 사전적 정의가 어떻든지간에, 학위가 필요한 건축 일을 한다면 그건 곧 건축가나 마찬가지인 것이라고. 아버지가 그간 설계도를 이리저리 만져가며 지어온 수많은 건축물들은 젊은 시절 건축업에 뛰어든 아버지의 커리어를 대변한다고, 말이다. 굳이 벽면과 기둥과 지붕을 예술적으로 꺾거나 에어컨 바람이 쏟아져내리는 책상에 고상하게 앉아 투시도를 그리는 일이 아니라면 어떤가. 아버지가 지은 수많은 아파트와 빌라, 사무실, 펜션들로 어렸던 나와 동생은 밥을 먹고 착실히 자라 성인이 되었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

이미 여러 방송과 각종 유튜브 채널에 건축 전문가로 출연하며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현준 교수의 <공간이 만든 공간>이라는 저서를 대학 졸업반 때 어느 인문학 교양 수업에서 접했다. (졸업반에 왜 교양 수업을 들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사실 지금도 인문학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냥 지루하고 막연할 거라고만 생각했던 인문학과 건축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궤를 함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건물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일 테니 말이다.

이 책은 ’공간‘이라는 개념에서 더 확장하여 아예 건축이라는 개념과 세계의 유명 건축물 전체를 우리 삶에 빗대어 바라보고 있다. 단순히 사람이 먹고 자고 생활하기 위한 건축은 선사시대의 움집으로 족하다. 그러한 일차원적-평면적 접근이 아닌, 벽 하나도 허투루 세우지 않았던 설계자의 의도와 그들의 멀리 뻗어나간 인생관까지도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유현준 교수의 분석력과, 건축이라는 개념에 대한 다정함 어린 시선이 엿보였다. 가히 건축공학과 인문학적 소양이 남다른 저자다웠고, 한편으론 저자의 높은 지성력이 부러워졌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선 빛이 난다. 과연 살아생전 가볼 일 있을까 싶은 가지각색 건물들과 시대를 빛낸 천재적인 건축가들의 향연 속에서 나는 어렴풋하게 내 아버지를 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엔 과연 어떤 의미가 숨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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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포르투갈 - 산티아고 순례길, 지금이 나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라면
한효정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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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보면 살면서 여행을 막연히 꿈꾸었던 순간이 많다. 이곳이 삶의 끝일지도 모른다는 절망에 빠졌을 때, 너무 지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기분이 들 때. 너무도 착실하고 모범적으로 살아온 우리는 여행을 꿈꾼다. 눈 감으면 당장이라도 가고 싶은 해외 여행지 세 곳을 못 대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마음 먹었을 때 곧장 망설임 없이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드물 것이다. 피치 못할 지갑 사정도 있을 것이고, 가족이나 직장 등의 현실적인 문제가 우리를 붙잡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여행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 비록 내가 직접 현지로 가서 경험해 보는 것은 아니더라도, 일반인인 그들이 연출 없는 상황에서 다양한 것들을 맞닥뜨리는 영상들은 일상에 파묻힌 우리에게 위안과 감동을 준다. 바야흐로 여행 유튜버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 작가는 약 예순의, 중년을 넘어서 초로에 접어든 장년기의 여성이며 ‘나로 존재하기 위해’ 포르투갈 순례길을 걷는다. 하루 만 보 걷기도 빠듯한데 걸너서 순례길 종주라니! 그것도 젊은 나이도 아닌데 말이다.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지 읽으면서도 감탄하게 되고, 동시에 내 발이 다 아픈 착각이 들었다. 살면서 한번쯤은 가봐야 한다는 순례길. 장년층 여성의 몸으로 혼자서도 척척 해외를 돌아다니고 낯선 타지에서 외국인 여행객들과 금세 친구가 되는 여행기를 삼자의 눈으로 바라보며 나만의 여행을 꿈꾸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디로 떠나고 싶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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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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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이유리 작가의 표제작을 비롯하여 문학계에서 주목받는 다섯 명의 신진 여성 작가들의 SF 소설을 싣었다. 평소 자이언트북스의 톡톡 튀는 작품들을 좋아했고, 벌써 자이언트북스의 세 번째 서평단 참여이지만... 학창시절 늘 문과에 과학 수업을 어려워했기에 사실 공상과학 작품을 크게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작품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0과 1의 세계나 어려운 미래 문명과 세련된 과학 기술에 완전히 의존해 살아가는 무력한 미래의 인간들이 아니다. 작품 속에서 ‘사랑’과 ‘휴머니티’, 그리고 ‘공존’을 다루는 작가들의 섬세한 문법이 너무나 와닿아 감명 깊게 읽은 책이다.

얼마 전, 알파고를 뛰어넘어 세계적 수준의 논문을 내놓았다는 #챗GPT 의 뉴스를 접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작품 속 근미래 세계에 근접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도로 발전된 세상에서 인간은 점차 인간다움을 잃고 있다. 그러나 한치 앞도 헤아리기 힘든 어둡고 춥기만 한 세상 속, 과학과 기술이 끝없이 발전하더라도 사랑의 가치는 여전하리라 믿는다. 평소 좋아하고 알고 있었던 작가님들과 새롭게 알게 된 작가님들을 한데 모은 책을 읽으며 내가 가진 사랑은 어떤 모양인지 가만히 헤아려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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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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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이유리 작가의 표제작을 비롯하여 문학계에서 주목받는 다섯 명의 신진 여성 작가들의 SF 소설을 싣었다. 고도로 문명화된 근미래 사회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의 가치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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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에게 가면
설재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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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주인공은 완전히 ‘센 언니’다. 주인공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저승사자에게 ‘우리 손녀 제발 밥 좀 먹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 정도로 탄수화물은 입에도 대지 않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런닝을 하며 자기관리를 하는 복싱 선수이다. (이때 나름의 판타지적 요소를 되게 흥미롭게 느꼈는데 생각보다 작품 속에서 저승사자들 비중이 적어서 아쉬웠다.) 그러면서 투잡으로 시골 초등학교 돌봄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갓생러’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알게 된 아이의 보호자인 ‘삼촌’과 각별한 관계를 맺는다. 건강하고 튼튼하며 활동적인 여자 주인공과 어쩐지 마르고 비실해보이는 남자 주인공. 편견 섞인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는 주인공 설정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여성 서사 아닌가. 약자와 소수자와 혐오와 차별과 다문화와... etc. 요즘은 슬슬 조금 지루하게 느낄 수 있는 캐릭터 구성이었으나 역시 아는 맛이 제일 잘 먹히는 법이다.

서사는 ‘순한맛’이었고 등장인물들은 무해하고 착했다. 친할머니도 아닌 할머니 손에서 자란 주인공과 자기 자식도 아닌 조카를 살뜰히 보살피며 주인공까지 챙기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13세 이용가 같은 느낌을 받았다. 로맨스적 사랑보다는 우정에 가깝고, 그것보다는 마치 양육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기새가 죽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전전긍긍 곁을 맴도는 어미새 같은 느낌? 아무튼. 아예 청소년 소설로 출판되거나, 청소년 나이대 아이들이 읽어도 무리가 없겠다 싶었다.

다만 이런 소재에 취향이 조금 갈리는 건 당연한 부분이라, 지루하게 느낄만한 요소도 있었다. 읽으면 누구든 체하지 않고 소화되는 흰죽 같은 느낌의 작품이었다. 읽어보면 좋지만, 막상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약간 희미하다는 점이 아쉬웠다. 큰 갈등 없이 물 흐르듯 전형적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조금 뻔하다는 느낌을 받을 법하지만, 뭐 어떤가. 이런 게 ‘힐링물’의 매력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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