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 남방의 포로감시원, 5년의 기록
최영우.최양현 지음 / 효형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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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일본은 진주만 공습 이후 그 기세를 몰아 독일, 이탈리아 등 추축국과 연합을 맺어 식민지배의 야욕을 더 거세게 불지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되어 전장으로 나아가는 상황. 나름 명망있고 지식인이었던 지역 유지 최씨 가문에 들이닥친 비극. 누군가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고 장남인 형을 전쟁으로 보낼수도 그렇다고 어린 동생을 전쟁으로 내몰 수 없던 그는 모두를 대신해 ‘포로감시원’이라는 직책으로 고국을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포로감시원으로서의 삶은 수많은 내적 갈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감시자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포로들의 노역을 관리 감독하는 일이기도 했다. 전쟁 초기에는 물자 공급도 생각보다 원활해 식량공급 등에서 문제를 겪지 않았지만 전세가 점점 연합국 쪽으로 기울어가면서 물자 공급이 줄어가며 관리에 차질이 생겨갔다.
모두가 알다시피 1945년, 전세가 역전되고 연합국은 전쟁을 종결시켰다. 그곳에서 일본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시작된 수용생활. 역설적이게도 그는 일본이 사로잡은 연합국 포로를 관리하던 곳에 추축국 포로로 갇히게 된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꿈이 그리던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반겨줄 이는 가족 외에는 없었다. 이제 막 독립한 신생국가의 어수선함, 피지배국민이면서도 전범국에 동조했다며 남은 꼬리표. 시대가 할퀸 상처는, 그리고 속절없이 흘러가버린 5년이란 시간은 꿈많고 호기심 많던 그를 바꾸어 놓았다.
여전히 일본군과 포로감시인, 포로감시인과 포로들과의 관계는 정확한 진상이 규명된 것이 없다고 한다. 그 전쟁의 피해를 사과받을 기회를 잃어버린 채 살았을 수많은 이들. 2000년대 들어서야 진상규명을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고 지금도 진행중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생경한 포로감시원. 누군가 소리내어 말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을 기억하지 않았을 이름. 그들의 소리가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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