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토의 주인 - 23일 폐쇄구역
지미준 지음 / 포춘쿠키 / 202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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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는 포춘쿠키 & 리뷰어스 클럽을 통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게토의 주인의 선행 공개를 통해서 보았던 첫 인상은 반려동물들, 반려견, 반려묘의 버려진 이야기로 동물들의 시점에서 종종 들려오던 반려동물들과 관련된 사건들에 대하여 풀어가는 이야기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책을 받아 보고 읽은 후 ‘게토의 주인’ 은 생각했던 것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적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사랑받았지만 사람에게 버려지는 것으로 시작한 개 한 마리와 사람들에게 고통을 받았지만 자연에서 살아가는 길을 잡았던 고양이 한 마리, 이런 두 동물이 만나서 보여준 것은 제목에서 볼 수 있던 것처럼 <ghetto> 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찾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단어만 알았더라면 이야기의 본질을 더 일찍 파악할 수도 있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의 이야기는 다시 뒤에서 이어가보도록 하면서 본편의 이야기에서.



*ghetto- 중세 이후 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유대인 거주 지역

사람에게서 버려졌다.





‘게토의 주인’을 쉽게 정리하면 버려졌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사람들을 보는 개와 고양이 같은 동물들이고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마리의 동물 개의 덕근과 고양이 칠백 둘의 만남으로 이야기는 사람을 통해 상처 입었던 동물들의 탈출과 우여곡절을 넘어서 지금의 장소에서 살고 있는 이야기들에는 무책임함과 폭력과 사람들의 악의가 묻어나오는 상황들이 존재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동물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나서는 사람들도 있었죠.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서 문뜩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의 몇몇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케토의 주인에서는 사람과 동물 간에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세상으로 그려져 있지도 않았습니다.

12페이지를 참고하면 ‘기다리라고 해놓고’ ‘저 낯선 인간들에게 나는 왜 걷어 차였을까.’ 로 덕근이 경험했던 일들을 보여주고 그런 사례들을 뒤받쳐 주는 모양으로 칠백의 경험에서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려지고 이는 사람을 향한 두 동물의 인상과 함께 사람을 향한 생각이 어땠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만남의 과정에는 칠백의 시점으에서도 하나 보고 넘어가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칠백의 신중함을 보여주는 그 일부로 21페이지의 장면을 거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넘기면서 이야기를 어디까지 언급을 해야 스포일러 없이 설명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 부분을 넘기면서 ‘게토의 주인’을 통해서 동물들이 생각하는 인간을 향한 첫 시점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알 수 없는 생물이라니까

게토의 주인 p.19

개도 고양이도 희로애락을 느끼고 사람역시 희로애락을 느끼는 생물이기에 한결같은 모습을 지니지 않은 인간을 본 칠백은 인간을 그렇게 표현해주었죠. 당한 일들이 많았기에 또한 덕근이의 경험을 통해서 이 발언에는 힘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덕근과 칠백은 여러 고초를 경험하면서 우연히도 한 장소에 만나서 서로 힘을 모아서 살아가기 시작하고 그렇기에, 이 이야기의 재밌는 부분이 보여 지기 시작합니다.


둘만의 장소에서 모두의 장소로 커지면서 일어나다


커졌다는 말은 그룹의 확대라고 불러야겠네요. 둘 만 있던 공원에서의 생활은 너무나 비대하게 커져버렸습니다. 이들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장면으로는 152페이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원주민 고양이들의 행동으로 너무나 큰 그룹이 되었다는 걸 재미있게 보여줍니다.

그러면 여기서 재미있다고 언급했던 이야기로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금 <동물농장>을 생각나게 하는 부분들의 연속입니다. 개와 고양이들이 모이고 모이다 보니 큰 그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그룹은 다른 구역의 동물들마저도 어찌해야 하는지 생각을 하게 만들죠.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으로 큰 그룹에는 리더가 있다는 점이죠.

공원에 터를 잡고 지내는 이들의 리더가 두 명이 있다는 겁니다.

덕근과 칠백이란 존재는 리더의 기질이 뚜렷했고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두 리더의 지휘아래에서 만들어진 규칙에 따라서 니들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회의를 펼치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사람을 동물화 했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죠. 커진 그룹은 결국 두 리더의 통제로도 한계를 맞이하면서 여기서 큰 사건이 하나 터지고 맙니다.

이 사건으로 인간에 대하여 적의와 공존이라는 의견으로 대립하면서 두 리더는 의견이 맞춰지지 않아 갈라지며 덕근은 복수를 바라며, 칠백은 남아있는 이들로 인간과의 공존을 꿈꾸며 이별을 맞이하죠. 참 아이러니하게도 서로가 상대해야 하는 건 공통된 인간 이라는 부분입니다. 같은 상대를 두고 다른 생각과 뜻을 가지고 보여주는 장면들은 풍자적인 분위기를 맛보게도 해줍니다.


덕근은 인간에게 버려졌고 인간에게 죽을 뻔 했고 인간에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까지 모조리 읽고 맙니다. 오직 복수라는 외길을 바라보면서 인간을 상대하기 위해선 무력이라는 주장을 앞세우면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와 함께 사람들이 적은 장소로 몸을 숨기고 한 편 칠백을 따르는 무리는 사람에게 위협을 받지 않기 위해서 공존을 주장했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일을 하면서 두 그룹은 정 반대적인 생활을 시작하면서 각자가 바라던 환경을 꿈꾸며 지냅니다. 여기서 회의와 리더와 지휘하는 이들은 인간의 사회를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의 한 장면은 152페이지 타이슨의 발언에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는 덕근의 모습을 들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인간 사회를 모방했던 풍경이기에 두 길로 갈라진 그룹에는 당연하듯이 탈락자가 나오기까지 하죠. 인간을 알 수 없는 생물이라고 했던 것처럼 이들도 생물이었고 자신들의 결정에 옳았는지 아닌지를 생각하게 되는 결정타를 주는 일을 경험하죠.

탈락자, 라고 할 수 없지만 이들은 경험을 통해 복수해야 할 대상이 아닌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를 공격해 죽이고 말았고 이를 통해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옳은지 아닌지를 답을 내리지 못하고 방황이 시작하고 방심하지 않기 위해서 공격을 향했던 계획에 동료를 잃고 사람들과 함께 공존하면서 지내겠다는 결심이 빛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인간에게 상처를 받았던 공포를 잊을 수 없던 한 마리가 공격을 하는 일로 나누어졌던 두 그룹은 자신들의 이상은 뜻대로 이루지 못하고 다시 한 자리에 모이면서 이야기는 마지막으로 향합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이 이해를 못한다네.





마지막으로 들어가면서 ‘게토의 주인’의 뜻을 알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인간에게 몇 번이고 상처입고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최후의 방법으로 취한 건 다시 뭉쳐서 인간이 살고 있는 장소를 빼앗는다. 아주 심플한 작전을 시작하죠. 그렇지만 이들도 알고 있었지만 절대적으로 대항 할 수 없다는 차이가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갇혀서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이 마지막에서는 사람들의 시점에서의 이야기도 비춰주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카메라를 설치해서 건물을 점거한 동물들이 죽어가는 영상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동물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고 도망치는 사람들이 속속 나오는 상황에도 그런 장면을 즐겁게 보는 권력자가 존재하고 있고 이 장면은 마치 약자의 죽음을 즐기고 있는 사회의 악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모양새라고 느끼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부분은 권력을 가진 자가 구해야 할 이들을 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방치한다고 볼 수 있겠고 다른 한 편으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이들이기에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로도 비춰지고 있다고 적어봅니다. 결과적으로 약자를 향한 공격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적으면 인간은 악의적이고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이야기에서 전체의 이야기로 보면 무책임하고 악의적인 인간들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그런 아이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도와주려는 선한 마음의 인간들도 있다는 점은 악의와 함께 선의 또한 공존을 하고 있기도 하죠. 아주 작은 희망은 하나의 생명을 구하기도 하고 못 본 척 넘어갈 수도 있죠.

그렇기에 머리론 이해하지만 가슴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이러한 이야기들의 전체를 보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다 읽은 후의 감상이 아닌 기분에서는 허탈감이 우선적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찌어찌해서 공생이라는 가능성이라는 희망적인 부분을 볼 수 있었나 싶었지만 실상은 사회, 아니 현재 수많은 반려동물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경고를 해주고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의 의도와 맞는지는 저로서는 확인 할 수 없지만 반려동물들이 사람과 같은 말을, 그리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더라면 상처를 입는 반려동물들이 지금 보다는 없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책임을 질 수 없다면 동점만으로 키우겠다는 생각은 좋지 않을 수도 있죠. 이들에게도 감정이 있고 여러 프로그램에서도 본 것처럼 그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 강렬하게 떠오릅니다.​

끝내며 게토ghetto라는 장소가 더 이상 세상에 만들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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