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멜기세덱 > 국어교육과 필독 도서 목록

<문학사>

   한국문학통사 1~6

   조동일 선생님의 <한국문학통사>는 국어교육을 전공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섭렵해 두어야 할 책이다. 각 시대별로 체계적이며 핵심을 찌르는 문학사 서술은 가히 조동일만이 할 수 있는 엄청난 업적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문학사에 대한 충분하고 폭넓은 이해는 국어교육 전공자로서 필수이다. 참고로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사람의 졸업장에는 전공이 '문학사'임을 밝혀둔다. 1~2학년 방학때 큰 맘 먹고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문학사

  김윤식 교수와 김현 교수의 업적이다. 한국 현대문학사가 체계적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현대문학사의 정론이라 할 수 있다. 반드시 읽어야할 책임에 틀림없다.

 

 

   한국소설사

  한국현대소설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책.

 

 

  한국현대시문학사

  젊은 비평가들의 업적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로 현대시문학사를 쉽게 정리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의 말이 정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기 때문이다.

 

 

<문학 일반>

  한국문학의 이해

  우리나라 문학에 대해 장르별 접근으로, 간략한 설명들이 들어있다. 기본서로서 한국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한국 구비문학의 이해

  구비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과 쉬운 설명, 구체적인 자료제시 등이 돋보인다.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이 함께 이루어낸 업적이다.

 

 

  문학이론입문

  다소 어렵지만 꼭 한번은 읽어두어야 할 책이다. 현대문학이론들이 이만큼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책이 거의 없다.

 

 

  문학비평용어사전

  문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4

  둘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문학과 예술, 나아가 세계의 문화를 읽고 내는 것은 국어교육만이 아니라 지성인으로서 반드시 알아야할 것들이다. 다소 딱딱하고 지루한 내용일 수 있지만, 마음먹고 달려든다면, 충분히 빠져들 수 있는 유익한 책이다.

 

 

<국어학>

  국어학개설

  국어학의 가장 기본적 입문서. 국어학 전반에 대한 개괄적 설명이 그리 어렵지 않게 서술되어 있음. 저자 이익섭 선생의 이 책은 현대 국어학의 정설이라고 할만 함.

 

 

  학교문법론

  이 책은 교육문법, 즉 학교에서 가르치는 문법[학교문법]에 대한 체계적으로 분석 기술하고 있음과 동시에 그에 대한 저자의 견해와 비판이 담겨 있다. 국어교육 전공자로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 단 학교 문법의 내용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가 된 상태에서 이 책을 보는 것이 효과적.

 

  국어의 역사

  국어사에 대해 이해가 쉽게 설명되어 있으나, 비판적인 읽기가 필요.

 

 

  표준중세국어문법론

  중세국어 문법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 돋보임. 현재 간행된 중세문법서 중 단연 최고의 정설이라할 수 있음. 독파하기에 다소 난해하고, 고문 등에 대한 어느 정도 이해가 필요함.

 

 

  문법교육의 이론과 실제

  현행 학교 문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문제점과 보완 설명이 친절히 기술되어 있음. 그 구성체계가 다소 빈약한 점이 있으나, <학교문법론>과 함께 읽으면 보다 효과적.

 

 

* 아직 미완성. 조만간 업데이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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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과 예술
메를로 퐁티 지음 / 서광사 / 198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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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퐁티의 주저가 나와 있는 마당에 이 낡을 책을 굳이 읽어야 할까. 아마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나온지도 한참 됐고, 번역의 질이 좋다고 할 수도 없다. 짐작컨대, 서울대 미학과에서 학부학생들이나 대학원생들이 윤독한 것을 오병남 선생이 정리한 것이 아닌가 싶은 혐의가 짙은 책이다. 메를로퐁티의 주옥 같은 논문들을 선정한 안목은 나쁘지 않다. 이 책에는 그의 생각을 잘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논문들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가치는, 메를로퐁티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발표한 "눈과 마음"이란 아름다운 글이 실려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를 미학의 관점에서 접근해서인지 그가 선보였던 인식론의 전모를 살펴보는 데는 한계가 있는 책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를 프랑스철학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하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텍스트이기도 하다. 메를로퐁티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특히 현상학 전반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현상학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데만 해도 적지 않는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므로, 그 맥락을 짚으려 똥줄이 타게 애쓰는 동안 저도 모르게 지치고 풀죽어, 정작 본게임에서는 기진맥진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 그런 문제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역시 맨땅에 헤딩하기를 권하고 싶다. 무조건 구해서 읽어보고, 의문점을 하나하나 체크한 뒤에, 그것을 낱낱이 점검해나가는 차례를 밟는 것이, 요령이라면 요령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현상학과 예술>에 실려 있는 좋은 논문들은 일독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번역의 문제를 일단 접어두고, 대강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읽어두고 이미지를 잡으면, 추후에 보다 정리된 책들로 그 세계를 치밀하게 다잡아갈 수 있다는 판단이다. 어려운 것을 어렵지 않게 이야기하는 것은 야박하게 말하면, 사기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난해한 것을 평이하게 풀어내는 대가가 있다면야 좋겠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메를로퐁티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 책을 참조할 수 있는 환경이 일단 마련됐다는 점을 먼저 인식했으면 싶다. 현상학 일반에 관한 논의 접하려면 우선 한전숙 선생의 <현상학>(대우학술총서)를 읽어두는 것이 유리하다. 그 다음, <현상학적 운동>(이론과실천)이라는 2권짜짜리 개론서를 읽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메를로퐁티의 주저인 <지각의 현상학> 서문을 읽으면 현상학 일반에 관한 틀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조차 번거롭다면, 다시 강조하지만 "눈과 마음"을 무조건 읽는 것이다. 이 한편의 논문만으로도 그의 진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책들이 속속들이 번역되어 출판가에 떠돌고 있다. 그가 사르트르와 벌였던 이념논쟁을 정리한 책은 비교적 충실한 번역으로 만날 수 있다. <프랑스지식인과 한국전쟁>(민음사)와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테러>(문학과지성사)는 그런 책들이다. 게다가 그의 유고집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동문선)도 얼마전에 번역되어 우리앞에 놓여 있다. 메를로퐁티의 매력에 흠뻑 취하고 싶은 사람은 "눈과 마음", "세잔의 회의" 같은 논문를 놓치지 말고 읽어보아야 한다.' ~야 한다'는 강압적인 언사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강조하고픈 마음에서 쓴 말이니 말이다. 메를로퐁티의 <행동의 구조>는 현재 조광제 선생이 번역 중이다. 생리학에 기반을 둔 메를로퐁티의 현상학 세계가 국내독자들에게 그 전모를 드러낼 시기가 어서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메를로퐁티의 "눈과 마음"이 전공자들에 의해 맛깔스러운 문체로 다시 번역되는 날도 손꼽아본다. 자신의 철학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소설을 생각했을 만큼 메를로퐁티는 글쓰기의 맛을 아는 사람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예술작품에 관한 높은 식견을 소유하고 있었다. 가뭄에 단비같이 "눈과 마음"은 그의 그런 면모를 확인시켜줄 논문이다. 추억의 힘에 기대어 메를로퐁티의 "눈과 마음"에 관한 몇 줄의 견해를 적어보았다.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지는 후설 철학은 사실, 철학사의 오해에 불과하다. 그의 미발표 수고(후설 아카이브에 산재해 있는 원고더미) 속에서 후설은 초기부터  생활세계의 현상학에 관해 몰두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숱하기 많기 때문이다. 그것에 관한 연구는 지금도 한창 진행중이다. 우리가 아는 후설은 아직 반쪽짜리인 것이다. 현상학이 화석화된 분과학문이 아니라 학계 전반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하나의 운동이며, 끊임없이 생성중인 학적 방법론이라는 사실을 다시 새길 필요가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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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하이드 > 마르틴 베르크 시리즈

 1.RoseAnna (1965)

스웨덴의 아름다운 호수가에서 발견된 젊은 여자의 시체. 교살당한 그녀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스톡홀름에서 전문가를 부른다. 골초에 살인과 형사 30대 후반의 워커홀릭의 전형인 마르틴 베크 형사 등장. 그녀의 신원' 로제안나' 라는 이름을 알아내는데만 세달 걸려주심. 스웨덴에서 1967년 1993년에 영화화되엇음.

2.The man who went up in smoke ( 1966)

3.The man on the Balcony (1967)

스톡홀름의 공원에서 살해된 어린 소녀.두 명의 목격자가 있는데 한명은 한마디도 협조하려들지 않는 냉혈한인 강도. 그리고 다른 한명은 세살난 소년.

4.The Laughing policeman (1968)

웃는 경관

 

 

5. The Fire Engine that disappeared (1969)

경찰감시하의 아파트가 폭파된다. 테러리즘? 암살? 혹은 그저 실수?처음으로 등장하는 조직범죄, 지하세계와의 싸움. 군발트 라르손의 활약이 있다고 한다!

6. Murder at Savoy (1970)

7. The Terrorists

8. The Abominable Man

9. Cop Killer ( Their a Martin Beck Police Mystery ;9)

Cop Killer 라니 에드 맥베인의 'Cop Hater' 경찰혐오자를 연상케 한다.

그나저나 6권부터 9권까지는 순서도 모르겠고, 아마존에서도 절판이다. 쩝.

10. The Locked Room

몇번째 시리즈인지 알 수 없다. Cop Killer 가 Maj Sjowall 혼자 쓴걸로 되어 있는걸 보면 1975년에 Per Wahloo 가 죽고나서 쓴 것 같기도 한데

The locked room은 또 두 사람이 공저로 되어 있다. 영문판으로서는 가장 최근에 나왔다. 어쨌든 있으니깐 일단 쇼핑카트로

시리즈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당췌 모르겠다. 이 책이 7번째 시리즈라고 하는 리뷰어가 있다.

 

angelus novus
마틴 벡Martin Beck은 제 전공이라. 쿨럭. 스웨덴 사람들이 읽는 추리소설 읽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놀라울 따름입니다. 참 많이도 읽습니다.
페르 발뢰Per Wahloeoe와 마이 셰발Maj Sjoewall 부부의 공저인 마틴 벡 10부작은 <범죄소설en roman on ett brott> 이라는 부제를 공유합니다. 1965-1975년 사이에 발표되었고,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Roseanna, 1965 로즈애너
2 Mannen som gick upp i rök, 1966 연기로 올라간 남자
3 Mannen på balkongen, 1967 발코니의 남자
4 Den skrattande polisen, 1968 웃는 경관
5 Brandbilen som försvann, 1969 사라진 소방차
6 Polis, polis, potatismos!, 1970 사보이살인사건(원제: 경찰, 경찰, 으깬감자!)
7 Den vedervärdige mannen från Säffle, 1971 세플레에서 온 추악한 자
8 Det slutna rummet, 1972 잠긴 방
9 Polismördaren, 1974 경찰살인범
10 Terroristerna, 1975 테러리스트
60-70년대 스웨덴 사회의 문제점까지 고스란히 작품 속에 녹인 것으로도 유명한 이 걸작들의 주인공 마틴 벡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매력적이지요. 늘 피곤에 절어 있으면서도 할 일 다 하는. 저 중에 두 편 정도 원어로 훑었던 기억이 납니다. 동료 렌나트 콜베리와 군발드 라숀도 개성 강한 인물이군요. 여러차례 영화로도 만들어진 작품들도 있고. 1990년대 말에 영화로 만들어진 벡 시리즈는 기존 10부작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지만 벡의 이미지에 잘 맞는 스웨덴 배우 페테르 하베르와, 사격과 격투에 능한 군발드를 연기하는 미남 스웨덴 배우 미카엘 페슈브란트의 연기로 깊은 인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같은 스웨덴 작가 헤닝 망켈의 발란데르 형사 시리즈의 원조격이 아닌가 하는. - 2005-06-12 03:44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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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언어에 대하여

 

 

 

 

 

마루야마 게이자부로의 <존재와 언어>(민음사, 2002)와 김상환의 "언어에 대하여",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창작과비평사, 2002)를 읽었다. 분량의 차이는 있지만, '언어'에 대한 계발적인 사고를 부추긴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내가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소쉬르가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줄곧 강조하는 '랑그(langue)'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아나그람 연구 등을 통해서 문제화하는 '랑가주(langage)'로서의 언어이다. 딜런 에반스에 따르면, 라캉이 말하는 언어도 랑그가 아니라 랑가주이다.

 

 

 



 

물론 이전에 지적했다시피, 랑그/랑가주의 구별은 불어에만 있다. 우리말로는 '언어/언어할동'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역시나 그 맥락적 의미가 다 전달되지는 않는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소쉬르에게 랑가주는 인간이 가진 상징화 능력과 그 활동들(언어, 행위, 음악, 그림, 조각) 등이며, 넓은 의미의 말에 해당한다."(122쪽) 또 "랑가주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주는 표지이며, 인간학적 또는 사회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진 능력으로 간주된다."(123) 이것을 마루야마는 촘스키와는 다른 의미에서 심층의 언어라고 부른다. 보다 알기 쉽게 얘기하면, 랑그는 랑가주의 일부로 포함된다. 그래서 랑가주에는 '랑그화된 랑가주'('랑가주1'이라 부르자)가 있고, '랑그화되지 않는 랑가주'('랑가주2'라 부르자)가 있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랑가주가 개별 사회에서 독자적인 구조가 되고, 특정의 공시적인 제도가 된 것을 랑그라고 한다. 랑그는 여러 언어에 공통되는 원리적 기호 체계이며, 개인의 행위를 규제하는 조건과 규칙의 총체인 가치체계이다."(123쪽) 그리고 이 "랑가주는 랑그 이전의 상징성의 활동으로서, 음성언어에 앞서는 원에크리튀르(archiecriture)나 코드 없는 무용인 몸짓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126쪽) 이 랑가주를 적극적으로 체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상징적 언어로서의 시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의 시평에 대해 검토하면서 김상환이 지적하는 것 또한 이 랑가주로서의 시적 언어가 아닐까? 그것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시적 언어는 언어의 안과 밖이 나뉘는 경게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김수영이 말하는 '언어 이전'은 그 자체로 완결된 기의의 질서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접경적 사태를 가리킨다. 언어를 이 접경적 사태 속에서 일어나는 기록의 경제학으로부터 성찰하는 것, 그것이 시적 사유의 영원한 과제이다."(129) 인용문에서 '언어 이전'의 카오스적인 질서란 소쉬르나 마루야마가 얘기하는 랑그화되지 않은 랑가주, 즉 '랑가주2'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랑가주1'과 '랑가주2'는 각각 자연언어와 상징언어에 대응할 것이다.

상징언어로서의 랑가주는 마루야마가 말하는 인간적 과잉의 산물이다. "나의 견해는 인간만이 앞에서 본 것 같은 본능의 도식 이외에 또 하나의 게슈탈트를 과잉물로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차 분절의 결과 생기는 <언어 구분 구조>이며, 그 그물눈은 바로 <상징화 능력과 그 활동>이라는 넓은 의미의 말에 따른 게슈탈트이다."(165-6쪽) 여기서 '상징화 능력과 그 활동'이나 '넓은 의미의 말'은 전부 랑가주에 해당한다. 그러데 이 상징언어라는 과잉, 혹은 괴물은 우리의 일상성에 대한 폭력에 다름아니다. "시어란 일상어에 가해진 조직적인 폭력"이라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주장을 떠올려 보라. 때문에 일상생활속에서의 일상적 자아는 일상적인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일상적 의식의 수준에서 이러한 과잉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 즉 절대적 언어를 상대적 언어화하여 제한할 필요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상대적 언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고 무엇인가를 전제하는 상대적 언어는 그런 절대적 언어가 선물한 의사소통 가능성 안에서, 그러나 그 가능성을 제한하고 왜곡하면서 성립한다. 문맥을 만들고 문법을 수립하면서, 지시관계를 확립하면서 절대적 언어를 상대화한다.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는 것, 그것이 자연언어의 탄생내력이다. 안정성과 도구성을 띤 자연언어는 절대적 언어의 외상적 폭력에 대한 반-폭력에서 유래한다."(김상환, 133쪽)

하지만 이렇듯 상대화된 언어, 상대적 언어는 메타-일상적 차원, 즉 초월론적인 사유의 지평에서는 불편하고 불충분한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제기되는 것이 자연언어에 대한 철학적 비판인 바, 그 비판과 극복은 두 갈래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한 갈래는 자연언어가 가진 의미의 모호성을 비판하면서 수학적인 인공언어를 설정하는 방향이고(구조주의나 분석철학), 다른 한 갈래는 자연언어가 가진 의미의 빈곤성을 비판하면서 시적 언어, 비유적 언어, 즉 상징언어를 전면화시키고자 하는 방향이다(니체 이후의 해체론). 전자는 자연언어에 남아있는 시적 언어의 잔재(찌꺼기)조차 말끔하게 제거하고자 하며, 후자는 '닳아빠진 동전'과도 같은 자연언어에 새로운 생명(=은유적 언어, 상징적 언어, 무의식의 언어)을 불어넣고자 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구조주의는 어떤 변형된 이상언어론, 어떤 형식주의적 초월론이다. 구조주의의 핵심은 '시적이거나 사적이거나 모두 수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로 집약된다. 그것은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을 인정하지 앟는, 다만 아폴론적 개방성 안에서만 이해된 언어관에 기초하는 이론이다. 여기서 시적인 것, 그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은 객관적 형식의 질서로 환원되어 버린다."(김상환, 147쪽) 포스트-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구조주의적 사유에서 배제되고 간과된 디오니소스적 개방성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적 심층에서의 맹목적인 우연과 의미의 모호성을 직시하고 긍정하는 것이다.

 

 

 

 



언어는 우리 존재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동일성도 거부한다. 오직 유일한 것은 영원회귀일 뿐.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이> 회귀하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을 향하여 회귀하는 것도 아니다. <영원회귀>는 반복이며, 반복되는 것만이 생성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바로 삶의 다양한 모습이며, 우연이며, 맹목적이기도 한 반복과 차이에 대한 긍정인 것이다."(마루야마, 257쪽) "이러한 활동에 관여하는 인간의 기쁨은 최고의 힘을 향한 의지에 의해 <생성에 존재의 각인을 찍는 것>, 즉 카오스가 기호화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인데, 동시에 우리는 이것이 <존재자>가 되어 정지하는 것도 항상 부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시지포스적인 끝없는 운동의 반복이다."(263쪽) 때문에, 리차드 로티의 말을 빌면, 강한 인간 - 그것은 곧 강한 시인(strong poet)에 다름아니다...

2003. 0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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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니체-자프란스키-흄

 

 

 

 

로이 잭슨의 <30분에 읽는 니체>(램덤하우스중앙, 2003)을 읽었는데(내가 읽은 건 2005년판 3쇄이다), 충실한 내용이고 좋은 번역이다. 이런 류의 책들 가운데에서는 '동급 최강'이 아닐까 싶다.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니체>(문예출판사, 2003)와 나란히 읽으면 좋을 듯싶다. 자프란스키의 책은 독일에서 2000년 니체 사망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된 책이며 내가 읽은 대목들에서 번역도 막힘이 없다.

  

자프란스키는 독일어권 최강의 철학자 전문 전기작가인데, <쇼펜하우어>, <하이데거> 등의 저작을 갖고 있고(이 모두는 영역돼 있으며 나는 <하이데거>를 영역본으로 갖고 있다), 올해는 <쉴러>도 출간한 걸로 안다. 모두가 번역되어 마땅한 책들이다(그러기 위해서는 <니체>가 좀 팔려줘야 한다!).

 

 

 

 

그의 에세이로는 <인간은 얼마만큼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지호, 1998), <악 또는 자유의 드라마>(문예출판사, 2002)가 국내에 출간돼 있는데, 후자는 아직 안 읽었지만 전자는 내용 좋고 번역도 좋다. 해서 자프란스키를 읽자!

 

 

 

 

한편, 영어권을 대표하는 니체 개론서로서 홀링데일의 <니체>(이제이북스, 2004)도 유용해 보이지만, 니체가 사랑했던 여인 '루 살로메'를 '루 잘로메'로 옮긴 탓에 눈밖에 나버렸다(명품은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 거기에 무슨 '신념'이 걸려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러권의 철학서를 낸 출판사의 작품 치고는 부주의해 보인다.

그건 그렇고, 잠시 짬을 낸 김에 <30분에 읽는 니체>에 대한 밑줄긋기를 해본다. 내가 관심있어 하는 대목은 112-117쪽인바, "새로운 철학을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와 "과연 진정한 세계가 있을까?"라는 두 개의 절로 돼 있다. 저자를 따라가 본다(나는 대부분의 책의 경우 읽기-따라가기가 그냥 모든 걸 말해준다고, 이해가능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사상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거의 대부분이 신이나 내세, 영원한 영혼 등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그런 개념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며 연대기적으로 아주 짧은 시간만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세계관이 그런 것처럼 우리의 언어도 그렇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그러니까 언어의 '자명성'에 대해서 의심해보아야 하다는 것. 즉, 언어에 대해서도 현상학적 판단중지가 필요하다.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는 문법을 없애기 전에는 신도 없앨 수 없다'는 유명한 주장을 한다. 이런 견해는 후에 모든 언어가 석기 시대의 형이상학을 유지하고 있다고 본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 러셀에 의해서도 제기된다. 우리가 보다 나은 철학을 원한다면 반드시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니체의 이러한 통찰은 거듭 음미될 만한데, 언어(문법)과 형이상학(신) 간의 내적 커넥션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가령 (하이데거에 따라) '3인칭 단수동사 현재형'에 모든 것이 걸려 있는 서구 '형이상학'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러한 동사 형태를 갖고 있지 않은 언어, 가령 한국어와 같은 교착어의 경우에는 문제의식이 온전하게 공유될 수 없다. 즉, 그건 '당신들의 형이상학'인 것. 그리스적 기원의 형이상학과 다른 형이상학이 구성될 수 있는 것은 아주 실제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언어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러시아어의 경우만 하더라도 존재동사(be동사)의 현재형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is/ist/est 대신에 아무것도 쓰지 않는 무(zero)형이다.

해서, 언어에 근거하자면, 러시아에는 서구와는 다른 종교, 다른 형이상학이 성립가능하며,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그건 한국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He is a student'를 '그는 학생이다'로 옮기고, 거기서 계사 'is'의 대응항으로 '이다'를 분석하는데, 그러한 대응의 불완전성만큼 서구의 계사존재론과 한국어의 존재론은 거리를 갖는다.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만큼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이 가능하다.

-"우리는 언어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그 언어가 만들어내는 허구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 니체는 심지어 물리학의 언어조차도 인간의 필요에 부합하는 허구이며 해석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니체는 원자와 같은 이론적 개념뿐만 아니라 모든 개념이 허구라고 말한다. 물체, 선, 표면, 원인과 결과 혹은 운동과 같은 개념은 모두 믿음의 산물이지 그 자체로는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니체의 원근법주의(관점주의)이다. 모든 것의 믿음의 문제이며 따라서 개종의 문제이다. 여기서 문득 니체는 흄을 떠올려주지 않는가?

 

 

 

 

-"인과관계에 대한 니체의 생각은 흄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흄은 인과관계가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통해 하나의 사건을 다른 사건에 연결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인과관계는 정신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주 필요한 것이다. 니체가 보이게 그것은 의사소통을 위해 유용한 관습적 허구이다."(강조는 나의 것) 들뢰즈가 흄(1953)에서 니체(1962)로 건너뛰는 데에는 9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지만, 내가 보기엔 거기에 어떤 단절/비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이 있다. 적어도 이 인과의 문제와 경험론적/실용주의적 태도를 흄과 니체는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습관적인/관습적인 믿음과 개종의 문제 역시.   

 

 

 

 

-"니체는 어떤 경우에도 철학적 관념론을 채택하지 않았다. 즉 정신의 바깥에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 말이다. 왜냐하면 니체는 정신의 바깥에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그 세상은 질서 있고 구조화된 우주를 갈구하는 인간의 희망에 결코 부응하지 않는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 세상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고사하고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니체는 칸트 철학의 유산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특히 나이가 들면서 '진정한' 세계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했다."

마지막 문장에 대해서만 나는 좀 유보적이다. 설사 '칸트 철학의 유산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니체 철학의 독창성을 구성하는 것은 (들뢰즈를 따라서) 칸트 철학과의 변별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잘 잃어버린 세계'를 제안하는 니체-로티의 관점이 보다 더 니체답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로티가 니체의 철학을 높이 평가하면서 듀이의 실용주의(프래그머티즘)과 등가의 것으로 간주하는 이유도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들은 모두 관념 대신에 망치를 들고서 철학을 한 대장장이들이었던 것이다...

05. 11. 29. 

P.S. 참고로 데이비드 흄(1711-1776) 철학에 대한 기본사항 혹은 '교양상식'을 정리해둔다. 독일 사람 에드문트 야코비가 쓴 <클라시커50 철학가>(해냄, 2002)의 내용이다. 24세의 나이의 흄은 프랑스에서 <인성론>(<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세 권으로 된 이 책은 1739-40년에 간행되었다(그러니까 그의 나이 서른이 되기 전이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최대의 업적으로 간주된다.

-"흄은 인식의 근거로서 오직 경험만을 인정한다. 그는 로크의 경험론을 출발점으로 하여 로크와 마찬가지로 직접적 '인상들'과 고정된 인상들에서 생겨난 '관념들'을 구분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물들의 실체를 감각들의 '묶음'일 뿐이라고 했던 버클리를 따름으로써 로크의 경험론을 극단으로 몰고간다. 버클리에게 있어 실체는 오직 지각하는 자아뿐이었다. 그러나 흄은 이 지각하는 자아조차도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자아의 내용이 변화무쌍한 감각 지각들일 뿐이라면 이것 역시 감각 지각들의 연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개념은 그저 사유의 유용한 보조 도구일 뿐이다."(151-2쪽, 강조는 나의 것)

이러한 흄의 자아관은 곧바로 니체의 자아관과도 연결되며 들뢰즈의 철학에서 가장 세련된 반향을 얻는다. 이른바 '흄-니체-들뢰즈 커넥션'이다. 인격체로서의 자아나 주체에 대한 들뢰즈의 공격은 젊은 시절 흄에 대한 그의 읽기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오이디푸스에 대항하여 안티오이디푸스를 내세우듯이, 그는 인칭적 사유에 대항하여 비인칭적 사유(혹은 4인칭적 사유)를 철학의 새로운 무대이자 역량으로 제시한다(들뢰즈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쉬운 길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인과 관념에 대해서도 흄은 같은 입장을 취한다. 우리는 결코 경험을 통해 사건 A가 사건 B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없으며 단지 A 다음에 B가  나타났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다. 섭씨 100도로 가열하면 물이 끓는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해서 이것이 인과 관계를 증명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제 태양이 졌기 때문에 태양이 떠오르리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일 뿐이다... 지금까지 태양이 매일 떠올랐다고 해서 이것이 내일도 태양이 떠오르리라는 절대적 보장이 되지는 못한다. 따라서 모든 것이 필연성에 따라 연속해서 생겨나는 창조의 질서라는 것도 증명될 수 없다. 그리하여 결국 이러한 질서를 창조한 자의 존재도 증명될 수 없다."(152쪽)

즉, 'A이므로 B'가 아니라 언제나 'A 그리고 다음에 B'라는 식이다. 여기서 A와 B를 묶어주는 것은 인과적 관계(논리)가 아니라 우연적인/습관적인 '접속'(커넥션)일 뿐이다. 이러한 회의론이 니체에게서 반복되고 있다는 건 앞에서 인용한 대로 로이 잭슨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전면적인 회의주의를 갖고 있었기에 영국에서는 니체가 그다지 반향을 얻어내지 못했던 것. 흄 자신의 평가는 이렇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공적은 이성과 감성 사이에 존재하는 기존의 권력 관계를 바꿔놓은 데 있다고 흄은 생각했다. 그가 이성을 '감각의 시녀'로 만든 것은 한편으로는 극단적 경험론의 입장에서 그렇게 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소위 '이성적인' 도덕률에서 감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인간과 육체에 보다 더 가까운 관계에 있는 감성의 우위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흄은 철저한 에피쿠로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에피쿠로스처럼 유물론을 이론적 토대로 하지 않고 감성의 실증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쾌락주의로 나아갔다."(154쪽)

하면, 그가 미학이나 예술론 저작을 남기지 않은 것이 의아할 정도이다. 그의 만년의 저작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울산대출판부, 1998)인데, 들뢰즈는 그 '재담'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참고로 '문필가'로서의 흄은 플라톤, 니체와 함께 서양 철학사를 통틀어서 톱클래스에 속한다. 이 레이스에서는 칸트가 중간 정도이며 그게 독일어인지 헤겔어인지 헷갈리는 헤겔이 꼴찌를 다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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