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니체-자프란스키-흄

 

 

 

 

로이 잭슨의 <30분에 읽는 니체>(램덤하우스중앙, 2003)을 읽었는데(내가 읽은 건 2005년판 3쇄이다), 충실한 내용이고 좋은 번역이다. 이런 류의 책들 가운데에서는 '동급 최강'이 아닐까 싶다.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니체>(문예출판사, 2003)와 나란히 읽으면 좋을 듯싶다. 자프란스키의 책은 독일에서 2000년 니체 사망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된 책이며 내가 읽은 대목들에서 번역도 막힘이 없다.

  

자프란스키는 독일어권 최강의 철학자 전문 전기작가인데, <쇼펜하우어>, <하이데거> 등의 저작을 갖고 있고(이 모두는 영역돼 있으며 나는 <하이데거>를 영역본으로 갖고 있다), 올해는 <쉴러>도 출간한 걸로 안다. 모두가 번역되어 마땅한 책들이다(그러기 위해서는 <니체>가 좀 팔려줘야 한다!).

 

 

 

 

그의 에세이로는 <인간은 얼마만큼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지호, 1998), <악 또는 자유의 드라마>(문예출판사, 2002)가 국내에 출간돼 있는데, 후자는 아직 안 읽었지만 전자는 내용 좋고 번역도 좋다. 해서 자프란스키를 읽자!

 

 

 

 

한편, 영어권을 대표하는 니체 개론서로서 홀링데일의 <니체>(이제이북스, 2004)도 유용해 보이지만, 니체가 사랑했던 여인 '루 살로메'를 '루 잘로메'로 옮긴 탓에 눈밖에 나버렸다(명품은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 거기에 무슨 '신념'이 걸려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러권의 철학서를 낸 출판사의 작품 치고는 부주의해 보인다.

그건 그렇고, 잠시 짬을 낸 김에 <30분에 읽는 니체>에 대한 밑줄긋기를 해본다. 내가 관심있어 하는 대목은 112-117쪽인바, "새로운 철학을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와 "과연 진정한 세계가 있을까?"라는 두 개의 절로 돼 있다. 저자를 따라가 본다(나는 대부분의 책의 경우 읽기-따라가기가 그냥 모든 걸 말해준다고, 이해가능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사상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거의 대부분이 신이나 내세, 영원한 영혼 등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그런 개념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며 연대기적으로 아주 짧은 시간만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세계관이 그런 것처럼 우리의 언어도 그렇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그러니까 언어의 '자명성'에 대해서 의심해보아야 하다는 것. 즉, 언어에 대해서도 현상학적 판단중지가 필요하다.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는 문법을 없애기 전에는 신도 없앨 수 없다'는 유명한 주장을 한다. 이런 견해는 후에 모든 언어가 석기 시대의 형이상학을 유지하고 있다고 본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 러셀에 의해서도 제기된다. 우리가 보다 나은 철학을 원한다면 반드시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니체의 이러한 통찰은 거듭 음미될 만한데, 언어(문법)과 형이상학(신) 간의 내적 커넥션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가령 (하이데거에 따라) '3인칭 단수동사 현재형'에 모든 것이 걸려 있는 서구 '형이상학'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러한 동사 형태를 갖고 있지 않은 언어, 가령 한국어와 같은 교착어의 경우에는 문제의식이 온전하게 공유될 수 없다. 즉, 그건 '당신들의 형이상학'인 것. 그리스적 기원의 형이상학과 다른 형이상학이 구성될 수 있는 것은 아주 실제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언어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러시아어의 경우만 하더라도 존재동사(be동사)의 현재형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is/ist/est 대신에 아무것도 쓰지 않는 무(zero)형이다.

해서, 언어에 근거하자면, 러시아에는 서구와는 다른 종교, 다른 형이상학이 성립가능하며,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그건 한국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He is a student'를 '그는 학생이다'로 옮기고, 거기서 계사 'is'의 대응항으로 '이다'를 분석하는데, 그러한 대응의 불완전성만큼 서구의 계사존재론과 한국어의 존재론은 거리를 갖는다.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만큼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이 가능하다.

-"우리는 언어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그 언어가 만들어내는 허구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 니체는 심지어 물리학의 언어조차도 인간의 필요에 부합하는 허구이며 해석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니체는 원자와 같은 이론적 개념뿐만 아니라 모든 개념이 허구라고 말한다. 물체, 선, 표면, 원인과 결과 혹은 운동과 같은 개념은 모두 믿음의 산물이지 그 자체로는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니체의 원근법주의(관점주의)이다. 모든 것의 믿음의 문제이며 따라서 개종의 문제이다. 여기서 문득 니체는 흄을 떠올려주지 않는가?

 

 

 

 

-"인과관계에 대한 니체의 생각은 흄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흄은 인과관계가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통해 하나의 사건을 다른 사건에 연결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인과관계는 정신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주 필요한 것이다. 니체가 보이게 그것은 의사소통을 위해 유용한 관습적 허구이다."(강조는 나의 것) 들뢰즈가 흄(1953)에서 니체(1962)로 건너뛰는 데에는 9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지만, 내가 보기엔 거기에 어떤 단절/비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이 있다. 적어도 이 인과의 문제와 경험론적/실용주의적 태도를 흄과 니체는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습관적인/관습적인 믿음과 개종의 문제 역시.   

 

 

 

 

-"니체는 어떤 경우에도 철학적 관념론을 채택하지 않았다. 즉 정신의 바깥에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 말이다. 왜냐하면 니체는 정신의 바깥에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그 세상은 질서 있고 구조화된 우주를 갈구하는 인간의 희망에 결코 부응하지 않는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 세상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고사하고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니체는 칸트 철학의 유산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특히 나이가 들면서 '진정한' 세계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했다."

마지막 문장에 대해서만 나는 좀 유보적이다. 설사 '칸트 철학의 유산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니체 철학의 독창성을 구성하는 것은 (들뢰즈를 따라서) 칸트 철학과의 변별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잘 잃어버린 세계'를 제안하는 니체-로티의 관점이 보다 더 니체답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로티가 니체의 철학을 높이 평가하면서 듀이의 실용주의(프래그머티즘)과 등가의 것으로 간주하는 이유도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들은 모두 관념 대신에 망치를 들고서 철학을 한 대장장이들이었던 것이다...

05. 11. 29. 

P.S. 참고로 데이비드 흄(1711-1776) 철학에 대한 기본사항 혹은 '교양상식'을 정리해둔다. 독일 사람 에드문트 야코비가 쓴 <클라시커50 철학가>(해냄, 2002)의 내용이다. 24세의 나이의 흄은 프랑스에서 <인성론>(<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세 권으로 된 이 책은 1739-40년에 간행되었다(그러니까 그의 나이 서른이 되기 전이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최대의 업적으로 간주된다.

-"흄은 인식의 근거로서 오직 경험만을 인정한다. 그는 로크의 경험론을 출발점으로 하여 로크와 마찬가지로 직접적 '인상들'과 고정된 인상들에서 생겨난 '관념들'을 구분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물들의 실체를 감각들의 '묶음'일 뿐이라고 했던 버클리를 따름으로써 로크의 경험론을 극단으로 몰고간다. 버클리에게 있어 실체는 오직 지각하는 자아뿐이었다. 그러나 흄은 이 지각하는 자아조차도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자아의 내용이 변화무쌍한 감각 지각들일 뿐이라면 이것 역시 감각 지각들의 연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개념은 그저 사유의 유용한 보조 도구일 뿐이다."(151-2쪽, 강조는 나의 것)

이러한 흄의 자아관은 곧바로 니체의 자아관과도 연결되며 들뢰즈의 철학에서 가장 세련된 반향을 얻는다. 이른바 '흄-니체-들뢰즈 커넥션'이다. 인격체로서의 자아나 주체에 대한 들뢰즈의 공격은 젊은 시절 흄에 대한 그의 읽기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오이디푸스에 대항하여 안티오이디푸스를 내세우듯이, 그는 인칭적 사유에 대항하여 비인칭적 사유(혹은 4인칭적 사유)를 철학의 새로운 무대이자 역량으로 제시한다(들뢰즈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쉬운 길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인과 관념에 대해서도 흄은 같은 입장을 취한다. 우리는 결코 경험을 통해 사건 A가 사건 B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없으며 단지 A 다음에 B가  나타났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다. 섭씨 100도로 가열하면 물이 끓는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해서 이것이 인과 관계를 증명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제 태양이 졌기 때문에 태양이 떠오르리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일 뿐이다... 지금까지 태양이 매일 떠올랐다고 해서 이것이 내일도 태양이 떠오르리라는 절대적 보장이 되지는 못한다. 따라서 모든 것이 필연성에 따라 연속해서 생겨나는 창조의 질서라는 것도 증명될 수 없다. 그리하여 결국 이러한 질서를 창조한 자의 존재도 증명될 수 없다."(152쪽)

즉, 'A이므로 B'가 아니라 언제나 'A 그리고 다음에 B'라는 식이다. 여기서 A와 B를 묶어주는 것은 인과적 관계(논리)가 아니라 우연적인/습관적인 '접속'(커넥션)일 뿐이다. 이러한 회의론이 니체에게서 반복되고 있다는 건 앞에서 인용한 대로 로이 잭슨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전면적인 회의주의를 갖고 있었기에 영국에서는 니체가 그다지 반향을 얻어내지 못했던 것. 흄 자신의 평가는 이렇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공적은 이성과 감성 사이에 존재하는 기존의 권력 관계를 바꿔놓은 데 있다고 흄은 생각했다. 그가 이성을 '감각의 시녀'로 만든 것은 한편으로는 극단적 경험론의 입장에서 그렇게 한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소위 '이성적인' 도덕률에서 감성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인간과 육체에 보다 더 가까운 관계에 있는 감성의 우위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흄은 철저한 에피쿠로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에피쿠로스처럼 유물론을 이론적 토대로 하지 않고 감성의 실증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쾌락주의로 나아갔다."(154쪽)

하면, 그가 미학이나 예술론 저작을 남기지 않은 것이 의아할 정도이다. 그의 만년의 저작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울산대출판부, 1998)인데, 들뢰즈는 그 '재담'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참고로 '문필가'로서의 흄은 플라톤, 니체와 함께 서양 철학사를 통틀어서 톱클래스에 속한다. 이 레이스에서는 칸트가 중간 정도이며 그게 독일어인지 헤겔어인지 헷갈리는 헤겔이 꼴찌를 다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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