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장은성 > 개인적인 감상과 공인으로서 언변을 혼동하면 곤란

우리나라의 과학을 책임지셨던 분인 정근모박사님이 이런 제목의 책을 내놓았군요. 정말 위대한 신앙고백이군요. 정말 위대한 과학자가 이런 신앙고백을 했다면 덩말 진정한 신앙고백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위대한 과학자는 이런 신앙고백을 하진 않지요. 그러니 그분은 위대한 기술자일지는 몰라도 위대한 과학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군요. 과학자라고 자처하시는 분마저 이런 신앙고백을 하는 나라인데 이공계 기피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요. 이공계가 돈벌이도 시원찮은데 더구나 그에 대한 자부심도 가질 수 없고 위대한 과학자도 되기 힘드니 말이지요.

과학은 인간에게 숙명이라고할 수 있다. 시지프스가 계속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밀어올려야하는 것처럼 불완전한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는 유일한 방법은 과학뿐인 것이다. 신앙인들은 인간은 신에게 순종해야한다고 한다. 인간이 과학을 버리고 신에 의지하고 순종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동물이 되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동물은 자연에 순종하고 자연의 질서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비밀을 밝히고 자연의 법칙을 이용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도 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간다.

인간이 신에게서 훔친 불로 신의 흉내를 내고 신에게 도전한다. 이것은 인간의 숙명이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신에게 도전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신이란 개념을 인간 자신이 창조한 것이다. 인간은 이처럼 자신이 창조한 존재에 도전하는 이상한 존재인 것이다. 스스로 목표를 만들어내고 그에 도전하는 인간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인간은 낙담할 수밖에 없고 신에게 기도할 수 밖에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신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인간을 꾸짖는다. 인간이 나약하기에 그 나약함에 절망하거나 포기하거나 의지하려고해서는 않된다. 그렇다고 교만하고 건방을 떨어서야 말이 안된다. 인간이 나약함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돕는 것 즉 신에게 도전하는 것뿐이다. 돌뿌리에 걸려 넘어진 아이가 울부짖으며 엄마가 일으켜세워주기만 바란다면 그리고 엄마만 원망한다면 그 아이는 결코 걸음마를 배울 수 없다.

넘어지더라도 인간은 스스로 일어서야한다. 신에게 의지하고 원망한다고 신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아신다. 그런 신이 게으른 인간을 책망할 뿐 인간의 기도나 원망을 들어줄리가 없다. 신장병으로 아들을 잃은 아픔을 과학발전으로 승화시킬줄 알아야한다. 그것이 과학의 길을 걷는 사람의 도리다. 과거에 의사들은 수많은 환자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다시는 그런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열심히 새로운 의술을 개발하는데 노력한 결과 오늘날 현대 의학이 있게된 것이다. 과학자가 과학자의 길을 포기한 것만큼 비열한 짓은 없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동물이 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다. 이성은 과학을 해야할 의무와 책임 권리가 있다. 과학자의 길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 어떤 순교자의 길보다 위대하다. 과학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이런 자부심을 가져야한다. 다시는 이땅에 엉터리 과학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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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장은성 > 무슨 공부길래 공부가 가장 쉽다는 걸까?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장승수, 김영사)라는 책이 김영사에서 나왔을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한국교육현장에서는 얼마나 하찮은 것을 배우 길래 공부가 가장 쉽다는 말이 저렇게 천역덕스럽게 나오는 걸까? 하고 의아해할 외국인들을 생각하면 부끄럽기가 그지없었다.

사실 진정한 학문탐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학자의 심정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의 답답함 그것이다.그런 답답함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 계속된다.

일례로 원자론을 주장한 볼츠만은 분명 그의 추측대로라면 원자가 존재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주위 학자들은 그의 이론이 틀렸다고 맹렬하게 반박하고 비난한다. 더구나 볼츠만은 그의 이론을 전개하면서 실험결과와 일치하지 않는 계산결과 때문에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에 빠진다. 그리고 결국 자살해버린다.

학문탐구의 세계는 이렇게 목숨이 걸린 처절한 투쟁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서라도 진리를 구하려고 하는 것이 학자이다.

외국의 어떤 사람도 어느 곳에서도 공부가 가장 쉬웠다는 말을 적어도 필자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학자를 교수를 부자나 정치지도자, 그 어느 누구보다 존경한다. 이유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학자는 인류 전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
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한국에서처럼 기존의 지식을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없이, 그저 달달 외워 시험 보는 것이 공부의 전부라면 가장 쉬운 일일수도 있다. 고시방에서 몇년 고생해서 출세할 수 있다면 그렇게 쉬운 공부가 세상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한국인들이여 자신들이 아는 세계가 전부라고 착각좀 하지 말자. 글구 진정한 학자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따위의 경거망동은 삼가하자. 오늘날 60억인구를 자랑할만큼 인류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군분투한 수많은 학자들 덕분이란 것을 잊지말자. 장군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굳굳하게 학문의 길을 걷는 사람들도 결코 적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공부가 제일 쉬었다고 토로하지 않는다. 왜냐면 공부가 가장 어렵다는 것을 잘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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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장은성 > 곡학아세의 형벌

저의 독자서평이 한개인의 인격과 신앙에 난도질한것인지는 모르겠읍니다.
아니 인격과 신앙에 난도질한 것 이상을 하고 싶은데 그럴 능력은 없어 한스럽군요.

하지만 정근모는 한 국가의 과학을 신앙이라는 개인감정으로 난도질 해버렸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한 개인을 난도질한 것과 한 국가를 난도질한 것 중
어느 것이 더 죄가 무거운가요?

이런 비판은 최소한 정근모 박사님처럼 학문적 업적을 이루었다거나 이 만큼의 신앙의 갈증을 느껴야만 할 수 있는가요?

그렇다면 님도 저를 비난할 자격은 없는 셈이군요. 님은 어떤 업적이 있으며, 저에 대해 얼마나 잘알며 신앙의 갈증은 어느 정도인지 저에게 보여줄 수 있는지요.

산속에 사는 필부도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면 그것을 비판할 자격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제가 정근모처럼 형식적인 가식적인 업적은 없다해도
그의 망언과 망동에 대해서는 비판할 자격이 있읍니다. 그것은 저도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권리가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어떤 이의 잘못된 언동을 비판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민주주의 입니다. 그게 과학정신입니다.

하지만 종교인들은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감히 성경책을 비판한다거나, 목사님을 비판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지요.

정근모가 제대로 된 과학을 한 과학자였다면 설령 아들을 수십명 수백명 잃었더라도 그것을 가슴에 묻고 마는 것이지. 이렇게 공개적으로 까발리는 남사스런 일은 하지 못합니다.

광주사태때 쌩때같은 아들들은 잃은 우리의 어머니들 그분들은 정근모처럼 책을 쓸 줄도 모르는 무지랭이이기에 그냥 자식의 죽음을 가슴에 묻어두는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정근모가 자식을 잃은 것은 독재 권력자의 시중을 들면서 곡학아세한 형벌입니다. 그가 그런 잘못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진정 정근모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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