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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손원평 지음 / 창비 / 2026년 3월
평점 :
"효원은 오늘도 그녀를 기다린다." [당신의 손끝] 첫 문장이다. 나는 이 관계의 끝이 어떤 파국으로 마무리 될지 이 짧은 단편의 마지막까지 읽지 않더라고 시작부터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단편 뿐만 아니라 이 소설집 전체가 마치 넷플릭스의 선정적이고 잔인한 영화를 보는 듯했다. 관계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이 그려내는 긴장감은 극도로 고조된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소설집을 읽고 있는 것일까? 몰입과 긴장을 원한다면 넷플릭스 보면 될 일 아닌가!
[태양 아래 반짝이는]에서는 등장인물의 인간관계가 보여주는 이야기는 재미와 몰입 면에서 넷플릭스를 능가한다. 윤동주의 시, '또 다른 고향'을 모티브로 한 [유령의 집]을 비롯한 이 소설집의 단편소설은 그야 말로 공포스러워 '식인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를 실감하게 해 준다. 이 소설집은 일상에서의 비정한 관계 너머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희망을 통해 어떤 따뜻한 위로와 위안을 주는 것도 아니다. 반려견과의 관계까지 포함해서 우리들의 관계가 그렇게 나의 나쁜 의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이 책을 읽고자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허구적인 위로와 위안이 줄 수 있는 면피가 이 소설집에는 없다.
그럼 왜 무엇때문에 나는 손원평의 작품을 읽는 것일까?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재미와 몰입을 위해서라면 넷플릭스 보면 될 일이고, 일상의 불안에 내 마음을 어디에 둘지 몰라 우왕좌왕 할 때 내 마음을 마음 '밖' 어딘가에 두어 잠시나마 불안을 잊게 해 주는 매체나 대상을 통해 그 불안을 잠재우면 될 일 아닐까? 자본주의체제에서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고 싶으면 [세습중산층사회]나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과 같은 좋은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면 될 일이다.
손원평 소설집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는 자본주의체제가 야기하고 있는 실상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시중의 수많은 사회과학 관련 책들이 지구 위의 일체존재가 모두 상호의존적 연관관계를 통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체계이론'을 통해 전지구적 차원의 생태학적 위기를 진단하고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손원평은 자본주의체제에서 그런 이론이 제시하고 있는 위기 진단과 대안이 자본주의체제의 하수인의 역할을 자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내가 손원평의 작품을 읽는 것은 그의 작품이 너와 나의 관계가 너와 나의 경계를 통해서 형성되기 보다는 너와 나로 구분되기 이전 경계 너머의 '하나'의 경지에서 마치 밝은 거울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체제 안의 불평등으로 일그러진 일상을 면밀하게 비춰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조각조각 갈라졌어도 내가 나라는 건 내 마음"이라고 했을 때 갈라진 내 마음도 없지 않은 분명한 현실이지만 갈라진 조각 너머의 차원을 달리하는 작가의 '마음'이 있기에 문학은 그토록 현대사회의 서늘한 민낯을 '조망'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체제에서 그저 정신없이 살다가는 "이리저리 떠돌기만 반복하다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발짝씩 나아가기 시작"하면 '도달할 목적지'가 "전보다 근사한 곳", "어떤 상태에 도달하리라는 것", 이런 참된 희망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문학의 자비로운 '마음'이 있어 가능할 것 같다. 이것이 넷플릭스가 아닌 손원평의 소설을 읽게 하는 나의 이유인 것 같다.
*이 서평은 출판사 이벤트에 신청하여 가제본을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