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정진영 지음 / 무블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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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소재로 하는 스토리들과 사뭇 다른, 13년 전 세상을 떠난 엄마를 AI로 다시 만나기까지 아들의 심리를 촘촘하게 그려낸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는 전직 기자 출신 원작자의 현장감 있는 기자 이야기로 호평을 받았던 황정민과 윤아 주연의 JTBC 드라마 허쉬의 원작자 정진영 작가의 신작 소설이다. 허쉬의 원작 침묵 주의보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후속작 젠가와 다시, 밸런타인데이를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이번 책 또한 기대감을 품고 읽기 시작한다. 뭐랄까, 세련된 문체라기보다는 살짝 투박한 느낌의 문체가 빠른 속도감으로 부담감 없이 읽힌다.

고되고 팍팍한 현실을 핑계 삼아 도망치듯 본가를 나와 기나긴 고시생으로 생활 끝에 오래된 연인과의 이별을 잊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로 지금껏 비켜간 행운을 한꺼번에 잡아챈 것처럼 첫 장편소설로 1억 원의 상금과 함께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 주인공 범우. 화려한 데뷔가 무색할 정도로 이후의 작품 활동은 쉽지 않다. 마치 한여름 밤의 신기루 같은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나아지지 않는 고된 삶이 이어진다.

가난에 지쳐 선택한 대필 작가로의 삶은 그럭저럭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하지만 작가로서의 자괴감에 빠져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간으로서의 생계와 작가로서의 자존감 사이에서 갈등하며 대필을 이어가던 중 전략적 이미지 변화가 필요했던 HT 나재필 회장의 자서전을 대필하게 되고, 그로 인해 범우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자서전 대필의 인연을 귀하게 여긴 HT 나재필 회장은 대필 작가로의 암울한 삶을 살던 범우에게 홍보실 영입을 제안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던가... 입사서류 제출을 위해 신체검사를 받던 중 범우는 대장암 4기 판정을 받게 된다. 삶을 포기하고 싶던 범우는 13년 전 투신자살한 엄마를 떠올리고, 외로운 생을 살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엄마를 따뜻하게 보듬지 못한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마지막 떠나는 모습이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자살을 꿈꾸지만,,,

"입관 전에 마주한 어머니의 얼굴은 마치 다른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어머니의 이마에 손을 대자 음습한 냉기가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며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숨이 막혔다. 너무나도 폭력적인 이별 방식이었다." (p.37)

마치 긴 꿈에서 깨어나듯 미수에 그친 자살에서 벗어나고 HT 나재필 회장은 대장암 환자인 범우에게 인공지능 연구실의 책임연구원을 제안하며 다시 한번 기회를 선물한다. 자신보다 어렸던 나이에 세상을 등진 엄마가 이끈 것처럼 잃어버린 아들을 모델로 만들어낸 인공지능 아이 은총과 대화를 나누는 경선을 만나게 되고 범우는 마지막 숙제를 풀어내듯 어머니의 흔적을 쫓는다. 지금껏 원망하기만 했던, 자신보다 어렸던 엄마를 이해하고 비로소 이별할 수 있게 된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로 태어난 엄마는 없어요.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엄마는 처음엔 미숙해요. 엄마를 연습할 시간이 없었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미숙한 엄마라도 자식을 원망하지는 않아요. 범우씨 어머니도 마찬가지셨을 거예요. 제 생각은 그래요." (p.101)

벼랑 끝으로 내몰린 대장암 4기의 대필 작가 범우가 엄마와 비로소 제대로 된 이별을 끝내고 새로운 인생을 앞두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무심코 보아 넘긴 목차가 끝으로부터 시작해 시작으로 끝난다. 그가 헤쳐나가야 할 고난이 결코 가볍지 않겠지만 멋진 시작을 기원해 본다.

"살아보니까 미워하는 감정이 남아 있으면 이별해도 이별한 게 아니더라. 이별한 이유를 몰라도 제대로 이별한 게 아니고." (중략) "만남만큼 중요한 게 이별이야. 이별을 소홀히 하지마." (p.268)

나보다 어렸던 엄마... 엄마라는 이유로 포기한 그녀의 꿈과 삶을 이해하려고조차 하지 않은 보통의 자식이었던 범우가 엄마의 흔적을 쫓으며 어린 엄마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진정으로 이별할 수 있는 마음이 되기까지의 여정이 먹먹하다. 나 또한 엄마에게 무조건적인 희생만을 요구하며, 엄마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 거의 없음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우리 엄마의 어릴 적 꿈이 뭐였는지, 엄마는 어떻게 살고 싶었는지,,, 내 아이들에게는 끊임없이 묻고 있는 사소한 궁금증을 엄마에게는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철없음이...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지는 시간이다.

"저는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어요. 어머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렸을 때 무엇을 꿈꿨는지, 어떻게 아버지를 만나 연애하고 결혼했는지, 그리고 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정 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제가 어머니를 미워했던 이유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었어요. 모르니까 용감했던 거죠." (p.239)

[ 네이버카페 책과콩나무 서평단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한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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