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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기억 1
윤이나 지음 / 팩토리나인 / 2021년 6월
평점 :
한동안 정치권에서 ‘기억에 겸손해야 한다’라는 말로 상대방을 공격하곤 했다. 물론, 상대편을 폄하하기 위한 정치권의 공방이었지만 ‘기억에 겸손해야 한다’라는 문장 자체는 여느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문장이라 하겠다. 자신의 기억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 나의 편파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에게 유리하게 왜곡, 기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어쩔 수 없는 본능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싶다.
사람의 기억을 삭제하거나 이식할 수 있다는 논문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천재 뇌과학자 한정우는 최고의 영예를 거머쥔 그날, 집으로 침입한 괴한에 의해 그의 기억과 함께 사랑하는 아내 지수를 잃었다.
영광의 순간 불어닥친 불의의 사고는 그에게서 아내를 빼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유일한 목격자였던 어린 딸에게서는 말을 앗아가 버렸다. 그날 그의 가족에게는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아내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 때문일까, 정우는 아내를 죽인 범인을 미치도록 잡고 싶다!
범죄현장을 목격한 충격으로 말을 잃은 아이를 일상으로 돌려놓기 위해 아이의 기억을 삭제하고 아이는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아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그를 점점 더 잠식하고 결국 그는 스스로 범인을 잡을 결심을 하게 된다. 기억의 삭제와 이식을 반복하며 점점 범인에게 다가간다. 그는 무사히 아내를 죽음으로 몰고 간 범인을 잡아 단죄할 수 있을 것인가. 연쇄살인과 과학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범인의 등장으로 마무리된다.
"순간적으로 눈이 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야. 나는 기억을 지우다 못해 왜곡한 거야. 내가 지수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기억하기 싫어서, 내가 그토록 나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p.252)
퍼즐 맞추듯 조각난 타인의 기억을 이어간다. 훔쳐본 타인의 기억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왜곡되기도 하고, 진실이지만 진실이 아닌 정보를 그에게 제공한다. 지금 나의 기억은 진실일까? 기억과 망각을 오가며 나에게 유리한 기억만을 모으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곱게 포장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기억을, 절묘한 왜곡과 갱신을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의 기억에 의문을 품게 된다.
"기억을 보는 게 마치 전능한 일처럼 느껴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기억을 보는 일로는 그 어떤 일도 막을 수 없었다. 되레 무기력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p.189)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면 없어져 버릴 증거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타나는 범인의 흔적들과 타인의 기억으로 스스로를 잃어가는 주인공.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억의 흔적을 쫓는 시간이 흥미롭다. 놈의 기억은 늦은 저녁부터 이른 새벽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흠뻑 빠져들 수 있는 소설이었다. Good!
"망각. 정우는 오래도록 망각에 집착했다. 신은 누구에게도 망각을 선물처럼 주지 않기에···. 하지만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망각은 의지다. 그것은 기억을 잊으려는 노력이 아니다. 그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만원인 지하철을 타고, 쌓여 있는 일 더미를 차근차근 하나씩 줄여 나가는 것. 친구, 애인, 가족과
전날 친구, 애인, 가족과 나눴던 실없는 농담을 떠올리며 피식 웃고, 퇴근 후 밀린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면 서 결국 그 옆에서 자신도 끓아떨어지는 것. 나쁜 기억에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p.263)
[ 네이버카페 몽실북클럽 서평단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한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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