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박영서 지음 / 들녘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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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8일. 오늘은 몸 상태가 최악이었는데, 어떻게든 억지로 출근했다. 말단 관리의 피곤함은 당연하니 하소연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오늘은 출장을 두 번이나 갔고, 높으신 분들과 회의를 계속했으며, 공문서 여러 개를 수정하고, 밤이 되어서야 간신히 결재를 받고 퇴근할 수 있었다. 하, 내일도 출근해야 한다니, 끔찍하다.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 (p.70)

애어른 같은 초등학생 일기를 훔쳐본 것 같은 책 읽기다. 짐짓 점잔을 빼면서 미주알고주알 투덜거리는 장난꾸러기 남동생의 이야기다. 역사 덕후 청년의 감성으로 어렵기만 한 그 시절의 이야기를 가볍고 유쾌하게 풀어준다. 나처럼 '역사=어렵다'로 연관 짓는 역사 포비아에게 딱 맞는 책이라 하겠다. 자질구레한 것까지 낱낱이 파헤치다는 의미를 지닌 '시시콜콜'을 제목으로 똭 붙여 놓은 이유를 말해주는 것처럼 보통의 역사 책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자질구레하고 좀스러운(?) 이야기들이 시시콜콜 등장한다. '하~ 내일도 출근해야 한다니 끔찍하다'라는 문장을 조선시대 선비가 그것도 체면과 겉치레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관리가 일기장에 썼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밥벌이가 힘든 건 매한가지 인가 보다. :)

본격적인 일기를 만나기 전 나타난 등장인물들이 그 시절의 핵인싸였음을 알리며 김령, 노상추 등의 캐리커처와 함께 소개된다. 잘 그려진 캐릭터라기보다는 살짝 어설픈 듯한 그들의 모습이 일기장에 시시콜콜한 불만을 써 내려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뒤짐을 지고 팔자걸음을 여유롭게 걷는 그 시절의 선비들의 2%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내가 직장인이다 보니 다른 일기 글보다 조선의 관리로서의 직장(?) 생활에 대한 글들이 눈길을 끈다. 철옹성 같은 취업의 문을 넘고 나니, 허참례를 비롯한 신입에 대한 선배들의 결코 가볍지 않은 폭력과 칼퇴를 시행할 수 없는 부담스러운 업무 더불어 동료와의 갈등과 암행어사의 허세까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똑같을 수밖에 없나 보다.

90년 대생 MZ 세대 다운 역사 덕후 청년 박영서의 시시콜콜한 역사서들은 사적이기 이를 데 없는 편지에 이은 일기까지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은 그 시절 어른들의 내밀한 일들을 들춰보는 재미를 아낌없이 선물한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일기였지만 그럼에도 평소 역사 속에서 접하던 사람들 보다 조금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려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보다 더 흥미롭다. 물론 일기와 함께 제공되는 역사 상식들은 일기를 매개로 하는 시시콜콜한 가벼운 역사를 충분히 의미있는 책으로 만들어 준다. 덕분에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역사라면 진저리를 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유쾌한 역사 책으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싶다.

"출근했더니 발령 공고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저기 멀고도 먼, 최전방 함경도 갑산진(甲山)으로 발령받은 당사자라니! 이럴 수가 있나. 이건 명백한 좌천이다. 나 같이 믿을 만한 사람도 없고, 줄도 없는 사람들이 늘 겪는 일이다. 하지만 비록 최전방이라 해도 관직은 관직이니까, 아예 받지 않는 것보단 나은 일이다. 그래도, 그래도······· 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은 가시질 않는다." (p.77)

[네이버카페 컬처블룸 서평단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한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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