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나는 대화와 어느 과거에 관하여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이정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11월
평점 :
품절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무심했던 한 마디가 때로는 총칼 보다 더한 무기가 되어 상대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남기곤 한다. 나 또한 무심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했을 것이며, 상대의 무심한 말에 여러번 상처 받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대화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줄곧 영향을 미친다. 차라리 칼에 베이고 유리에 찔린 상처라면 적당한 흉터를 남기고 아물기라도 할텐데, 무심한 행동과 말로 인한 상처는 아물수 있는 물리적 상처가 아닌 탓에 긴 시간에도 아물기를 거부한다. 숨 죽인 채 내면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어느 샌가 눈앞에 나타나 혼란을 가중시킨다. 이 책의 짧은 단편 사례들처럼 쿨한 용서가 아니라, 흡족할 만한 복수가 실행 되어야 사라지는 상처가 되어서 말이다.


# 동기 나베의 신부​

대학을 졸업한지 7년쯤 지난 어느날 대학시절 합창부 멤버들에게 소식이 날아든다. 합창부 여학생들에게 오로지 남사친으로만 보이던 나베의 결혼소식이다. 하얀 얼굴과 다소 외소한 외모 덕분에 여학생들과 섞여있어도 전혀 이질감 없는 친구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특별한 색깔없이 무심하던 그와 결혼을 앞둔 여자친구는 범상치 않다. 깔끔하지 않은 뒷소문과 주변을 배려하지 않는 언사 등 여학생들의 심기를 묘하게 거스른다. 그럼에도 나베는 여자친구의 무례한 행동을 말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합창부 동창들을 멀리하기 시작하고... 그들의 인연은 그렇게 갈무리된다. 특별한 색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이유로 이용만 당하던 나베가 지키고 싶은, 지켜줘야 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기위해 그녀들과의 인연을 스스로 잘라냈던 것이다.

"행복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킬 수 있는 사람, 영원히 자신이 지키고픈 사람을 그는 찾아냈다." (p.51)​


# 돋보이지 않는 아이​

어린 시절 아이에게 선생님은 아이를 둘러싼 세상이 되곤 한다. 악의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선생님의 한마디가 아이의 세상을 얼마나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지를 조곤조곤 보여준다. 천사의 얼굴로 어른이 되어 그 시절 선생님처럼 선생님의 세상을 뒤흔들만큼의 영향력을 가진채 일상의 균열을 만들어간다. 선생님을 세상의 전부로 기억하는 아이에게,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이로 여겨지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세상을 살아갈 에너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설령 악의가 없었더라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관계였다면 대화에 신중을 기해야하는 이유이리라.


# 엄마, 어머니​

아이가 잘되길 바라는 이유만으로 자식을 소유물처럼 여기는 부모들이 많다. 세번째 에피소드의 말문을 열게하는 류노스케의 엄마 또한 이런 부류의 엄마다. 아이의 기분이나 여건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 물론 선의로 - 모든 일상을 엄마의 기준으로 맞춘다. 그런 류노스케의 엄마를 바라보는 선생님 스미는 어릴적 자신을 기억하며, 그런 엄마쯤 때가되면 지워져 버릴거라며 동료 선생님과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이어간다. 어릴적 엄마를 서서히 지워가며, 상상속의 어쩌면 자기에게 맞춰진 엄마를 채워간다.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을 의무로 여기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벗어나고 싶은 딸의 몸부림이 흡사 괴기 소설을 읽는 듯한 섬뜩함을 가져온다.


# 사호와 유카리​

학창시절 인싸였던 사호와 아웃사이더렸던 유카리가 입장이 뒤바뀐 채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났다. 어린시절 사호를 우상으로 만들어줬던 것들을 무기삼아 장난처럼 비참하게 만들었던 유카리를 갑을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채 말이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며 유카리를 피해왔던 사호는 그녀의 복수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녀 또한 유카리에 대한 그녀의 행동이 옳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자신만 복수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억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 사람들은 자신이 무심하게, 악의가 없다고는 하지만 다른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까. 

"기껏해야 어린 시절의 일이다. 보잘것없는,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옛날 일. 하지만 그것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그녀는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때 반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였는지를 판단하고 곱씹으며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부여하면서 아마도 평생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그 기억 속으로 되돌 아가기를 반복할 것이다." (p.242)​


과거의 대화에서 이어지는 현재의 사건을 엮은 짧은 단편이지만, 상처를 받은 누군가에게는 아물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일생을 지배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나 또한 유사한 기억이 없지 않음에 상처의 깊이에 공감이 되어버린다. 잊은 듯 살아가지만, 용서할 수 없는 모든 대화들을 잊고 싶어진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한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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