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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트
아네 카트리네 보만 지음, 이세진 옮김 / 그러나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전부 다 늦은 건 아니에요. 아가트. 아니고말고요. 나는 인생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선택들의 기나긴 연속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 선택의 책임을 거부할 때만 그것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되어버리죠." (p.62)
오랜만에 만난 잔잔하고 평온한 글이다. 72세, 은퇴를 5개월 앞둔 노의사는 자신에게 남은 상담 800회를 거꾸로 세어가며 지리한 일상을 살아낸다. 긴 시간 다양한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으나 진심을 다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는 않았다. 때로는 무의미한 추임새로 일관하거나, 환자의 이야기는 뒤로한 채 그림 그림그리는 일에 집중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일상이 무료하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정작 치료가 필요한 건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삶속에서 더 깊은 세상으로의 단절을 기다린다. 5개월, 22주, 800회의 상담을 세어가며...
은퇴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치료받기를 주장하는 아가트가 등장하고 그는 반복되는 아가트와의 상담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되는 방법을 찾고 싶은 아가트와 그녀와의 상담속에서 세상과의 단절을 깨고 한걸음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노의사. 껍질을 깨고 싶어하는 아가트의 몸부림에서 자신을 찾게 되고, 어느 순간 더이상 남은 상담횟수를 세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아 살기 시작했던 - 가구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부모님이 쓰시던 물건들이다 - 낡은 집을 정리하고, 사소한 관심 조차 나누지 않았던 비서 쉬리그 부인의 집에 꽃을 들고 방문하기도 한다. 말기 암으로 투병중인 쉬리그부인의 남편 토마에게 용기를 전하고, 그의 장례식장에서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기대어 그가 세상을 두고 떠났음을 슬퍼하기도 한다.
아가트에서 느끼던 계피향을 쫓아 풍미 가득한 케잌을 구워 사과의 마음을 담아 벽하나를 사이에 둔 남자에게 전하며 안도감을 느낀다. 늙은 노의사의 하루하루가 특별한 환자 아가트를 만나 흑백으로 가득찼던 일상이 담백한 수채화가 되어간다. 아직은 세상과 단절되고 싶지 않음이리라.
귀머거리, 벙어리인 것조차 모르고 살았던 이웃의 남자에게 자신의 무심함을 사과하기 위한 케잌을 굽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아가트의 손에 이끌려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어는 노의사의 일상을 응원하게 된다.
"같이 들어가실래요? 아니면 어떻게 할까요?"(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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