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회랑정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임경화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8월
평점 :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죽어도 괜찮아."
회랑정 살인사건은 1991년에 첫 출간되어 30여 년간 꾸준하게 사랑받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다. 작품답게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흡인력을 자랑한다. 어쩌면 이렇게 쫀쫀한 글을 쓸 수 있는 건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자본주의, 외모지상주의 등 특별할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진부한 소재를 오로지 그의 필력만으로 맛깔나게 버무려 나간다.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나이 든 여인의 모습으로 이치하가라가 다키하라의 유언장 공개장소인 회랑정을 찾은 기리유 에리코. 그녀에게는 무슨 사연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일까? 이치가하라 일가가 모인 시끌벅적한 자리에서 그녀의 눈동자만이 바쁘게 무언가를 찾고 있다. 수년 전 회랑정의 살인사건을 뒤로한 채 모인 이들은 또다시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막대한 유산을 둘러싼 숨 막히는 긴장감은 가족을, 그곳에 있는 모두를 범인이라 지목하고 있다.
복수를 위해 스스로를 감추고 회랑정으로 숨어든 에리코는 숨겨진 아픔이 있는 인물이다. 외모를 비롯한 모든 것이 여성성과 거리가 먼 탓에 아무도 그녀를 오롯이 여자로 보지 않는다. 그저 지성을 갖춘 일 잘하는 한 사람으로 바라볼 뿐이다. 심지어 막대한 재산을 가진 다카아키는 마지막 순간 그가 일군 기업을 이어나갈 사람으로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재혼을 생각하기도 한다. 에리코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을 이어받을 후계자로 말이다. 에리코가 물욕에 가득 차 있었다면 기꺼이 다카아키의 마음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지만, 그즈음 에리코에 마음을 가득 채운 한 사람이 있다. 그를 위해서는 목숨 따위도 아깝지 않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비운의 여인 에리코에게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다. 회랑정의 화재사건으로 감춰진 베일에 싸인 사건의 진짜 범인을 찾기 위한 에리코의 처절한 복수극은 또 다른 살인사건을 일으키고... 단지, 사랑만을 원했던 한 여인의 소박한 소망을 무참히 짓밟은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들어낸다.
시놉이 복잡하지는 않은 추리소설임에도 숨어 있는 반전 덕분에 끝까지 진범을 추리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나와 같은 거라는 소심한 위안이 필요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에리코의 비밀과 마지막 두어 장을 남겨두고 밝혀지는 진실은 추리소설의 긴장감과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에리코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여성의 심리묘사, 특히 악녀의 심리묘사(회랑 정의 에리코는 악녀라 할 수 없지만)에 탁월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매력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즐거운 책 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