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타자기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황희 지음 / 들녘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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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던진 타자기에 얼굴이 짓이겨져 스스로 생을 마감한 나의 어머니에게" (p.41)

검은 신발을 남긴채 품속의 강아지와 함께 서서히 사라져 가는 소녀. 잔뜩 웅크린채 사라져가는 소녀는 알 수 없는 사연을 간직한 듯 하다. 선천적 기형으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소녀 지하의 백일몽을 기반으로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엄마와 선천적 장애를 가진 딸이라는 어두운 소재를 부담스럽지 않게 풀어나간다.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짧지 않은 분량에도 지하의 백일몽을 함께 겪은 것처럼 시간이 멈춘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원치않는 결혼으로 가족으로부터 끊임없는 학대에 시달리고 있는 지아의 엄마 서영. 그녀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단편소설 공모전에서 수상을 할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는 작가지망생이었지만, 현실은 꿈도, 희망도, 미래도 그리고 자신 조차도 지켜내지 못하는 인형에 불과한 삶을 살고 있다. 불행한 결혼은 임신으로 이어지고 서영은 쌍둥이 지민과 지하를 낳게 된다. 운명의 장난처럼 지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농아의 삶을 살게되고 서영은 지하가 농아가 된 것이 자신이 잘못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지만 지옥같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때리면 맞고, 가두면 갇히는 영혼없는 삶을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가정폭력에 지친 서영의 딸 지하는 금고의 돈을 훔쳐 엄마의 어릴적 꿈을 담고 있던 타자기와 함께 가출을 감행하고 현실도피를 꿈꾸는 지하의 염원을 담은 백일몽이 이어진다. 로그아웃 - 로그인,,, 그리고 그녀는 항상 꿈꿔오던 글을 쓰기 시작하고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세상에 부딪혀 결실을 맺게 된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지하의 책 '조용한 세계'는 영혼을 잃은 채 갇혀 있는 서영에게 전달되고, 서영은 지하로부터의 도착한 충격적인 헌사에 힘을 얻어 지옥 밖으로의 탈출을 실행한다. 자신과 지하를 지키기 위해.

"두근거리는 가슴을 앚고 지하가 쓴 책의 표지를 넘기던 서영은 첫 페이지에 적힌 헌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남편이 던진 타자기에 얼굴이 짓이겨져 스스로 생을 마감한 나의 어머니에게' 서영은 자신도 모르게 책을 덮여 버렸다. 가슴이 불쾌하게 뛰었다." (p.41)

영은의 타자기를 매개로 현실의 지하와 순간이동으로 그려지는 백일몽 속의 지하, 그리고 영은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각각의 캐릭터가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며 독자를 끌어들인다. 소설속의 소설이라는 기묘한 설정으로 존재하는 '조용한 세계'는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지하와 영은이 자신을 찾아 세상으로 나오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풀어나간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범죄를 저지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어느새 설득당하고 만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쿨하게 헤어진 지하와 영은이 백일몽에서 로그아웃하고 행복한 세상으로 로그인할 수 있기를 응원하게 된다. 여유로운 주말 가볍게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글이었다.

"자기 최면, 자기 암시에 익숙해지면 돼요. 그게 익숙해지면 '로그아웃'이라는 명령어만으로도 내가 만들어둔 머릿속 세계에 '로그인' 되죠.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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