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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52번가' 하수구의 철학자 라바
라바 원작 / 톡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내가 라바를 처음 만난 건 멍 때리며 한 시간 이상을 타고 다니던 출퇴근 버스다. 어리바리한 벌레 두 마리가 종횡무진 화면을 누비며 지루한 출퇴근 시간에 단비 같은 웃음을 선사하곤 했다. 엉뚱 발랄한 이들은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귀염귀염 한 매력을 무한 발산한다. 노랗고 빨간 라바 두 마리는 뭇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하수구 벌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리고 행복하게 사는 일상의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라바 원작의 '뉴욕 52번가 하수구의 철학자 라바'는 일상의 평범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사실들을 읽기 쉬운 짧은 문장들로 구성한 아포리즘 에세이다. 아포리즘 형태의 구성은 부담 없는 편안한 독서를 도와준다. 움직이는 라바들을 볼 때처럼 이 책도 편안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물론, 짧은 문장에 담긴 많은 행간을 읽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짧은 문장과 문장에 어울리는 라바들, 그리고 그들의 다채로운 표정은 일상의 지루함을 밀어낸다. 하수구에 사는 벌레들도 이렇게 행복한데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고 있는 내 인생이야말로 걱정할게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잠깐의 오만함도 맛보게 한다. 글자를 읽는 것보다 라바들의 표정을 보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
두 마리의 라바는 750만의 유튜브 구독자와 200만 페이스북 팔로워를 거느린 인플루언서다. 하지만 그들은 인플루언서임을 들어내지 않는다. 그저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도시를 천천히 기어 다니며 무언의 위로와 휴식을 선사한다. 죽고 못 살 것 같은 두 마리 애벌레가 먹을 것을 사이에 두고는 천척인 양 다투기도 하고,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도 서로에게 위험이 생기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서로를 구하곤 한다.
현실은 하수구지만 그들의 삶은 결코 하수구가 아니다. 매일매일 먹고살기 위해, 안전을 위해 열심히 기어 다녀야 하지만 그들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면서 느리고 행복하게 기어 다닌다. 하수구에서 어쩌다 마주친 도넛을 나눠먹기도 하고, 서로를 괴롭히듯 놀리는 일상을 멈추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에게 주어진 여건에 만족하며, 더 많은 것을 욕심내지 않는다.
어쩌면 라바들의 느린 움직임은 일상에 치여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뉴욕 시티즌들에게 던지는 무언의 메시지 인지도 모르겠다. 갈 길이 먼 인생,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고 자신을 돌보며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나의 일상을 라바처럼 바꿀 수는 없겠지만, 잠깐의 여유를 품은 일상이 그리워지게 하는 책읽기 였다.
[마법의 주문]
불안해질 때가 있다.
나는 걸어가고 있는데
모두 뛰어가는 것만 같아서.
그럴 때면 아예 멈춰 서서
가만히 주문을 읊어 본다.
나는 나답게, 천천히.
마법의 주문은 때로는 무척 단순하다.